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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통 같은 장례식장·납골당… 더 인간다운 죽음을 위해 건축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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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통 같은 장례식장·납골당… 더 인간다운 죽음을 위해 건축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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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30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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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 감독의 영화 ‘후회하지 않아’에는 독특한 장례법이 등장한다. 게이 호스트바의 신입 선수가 차 사고로 죽자, 선배 선수가 그의 뼈를 수습해 달리는 차 안에서 창 밖으로 뼛가루를 흩뿌리는 장면이다. 화려한 도시 생활을 꿈꾸며 상경, 물주를 졸라 얻어낸 차를 몰고 첫 드라이브를 나갔다가 죽은 스무 살 청년. 장례식장에서 울어줄 친지 하나 없이 외롭게 죽은 그에게 서울의 차가운 아스팔트만큼 잘 어울리는 장지가 또 있을까? 그러나 현 장례문화 안에서 이는 불법이자 일탈이다. 좁아터진 국토에서 망자의 유골이 갈 수 있는 곳은 닭장 같은 칸막이 납골당뿐. 그나마도 유족이 허리를 펴고 조문할 수 있는 칸에 입주하려면 돈을 더 내야 한다. 죽어서도 ‘차렷’ 자세로 열 맞춰 잠들어야 하는 이 땅에 지금 건축적 상상력이 절실하다.

“더 좋은 건물에서 죽고 싶다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올해 2월 테드(TED) 강연에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는 영국 건축가 앨리슨 킬링의 영상이 올라왔다. 제목은 ‘더 나은 죽음, 건축가가 도울 수 있습니다’. 그는 죽음과 건축에 관해 토론을 활성화하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주제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것에 대해 말하길 꺼립니다. 여러분께 생각해보라고 하고 싶네요. 좋은 죽음이란 어떤 것인지, 좋은 죽음을 뒷받침하는 건축은 무엇인지에 대해서요.”

한국에서는 이 질문 전에 건축이 죽음에 개입한 적이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불행히도 현재 한국사회에서 가장 천박한 풍경 중 하나는 결혼식장과 장례식장에서 만들어진다. 생의 중대한 변곡점, 가장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몇 번이고 물어도 부족한 그 순간에 선택의 권리란 없다. 끔찍한 드레스와 끔찍한 화장, 끔찍한 식사를, 다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견디고 나면 결혼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삶의 시궁창에 처박히는 기분이다.

시장이 만든 패키지 상품에서 일탈할 경우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은 죽음의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조문소의 말라비틀어진 수육은 상실의 슬픔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라 쳐도, 묘지와 납골당의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은 참담하기 그지 없다. 금박을 씌우고 꽃을 두를수록 참담함은 더해간다. 화려할 권리를 뺏기는 것보다 더 슬픈 건 소박할 자유를 잃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소비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시장의 요구가 아무리 천박하더라도 맞춰갈 수 밖에 없는 거죠.” 분당메모리얼파크를 설계한 건축가 김동원(스튜디오ZT 대표)씨는 디자인이나 문화와 관계 없이 오로지 경제논리로만 돌아가는 건축의 대표적 사례로 장례식장을 꼽았다. 국가에서 추모시설을 지을 땐 건축가에게 설계를 의뢰하기도 하지만 민간시설의 경우 철저히 상업적 목적으로 지어지기 때문에 디자인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 묘지사업의 대부분은 민간업체가 하고 있는데, 좁은 땅덩이에서 묘가 없어 못 파는 마당에 굳이 외관을 개선할 필요를 못 느끼겠죠. 업체 쪽에서는 아쉬울 게 없을 겁니다.”

화장을 택해도 선택의 폭이 좁기는 마찬가지다. ‘납골당=혐오시설’이라는 인식 때문에 교통이 편리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고, 위치와 예산에 맞는 납골당만 찾아내도 감지덕지다. 사흘이란 짧은 기간 안에 번갯불 콩 구워먹듯 이 모든 일을 해치우고 나면, 택할 수 있는 건 분골함 디자인 정도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소비자의 침묵이다. 매장 방법과 위치 선정엔 촉각을 곤두세우던 사람들도 납골당과 묘지의 조악한 형태에 대해선 무감한 경우가 많다. 자동차나 패션 분야의 수준 높은 안목을 생각할 때 이 같은 무관심은 신기할 정도다.

김 대표는 “다른 분야에 비해 건축에 대한 소비자 취향은 현저히 낮은 상태”라고 말한다. “한국에서 건축은 문화보다는 부동산의 개념에 가깝기 때문에 묘지와 납골당이 건축 디자인적으로 세련되거나 의미를 담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습니다. 이는 소비자들의 눈이 올라가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외국 자동차가 인기를 끌면서 국내 차의 디자인이 급속도로 개선된 것처럼요.”

몇 안 되는 분골함 항아리 앞에서 고민해봤자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더 좋은 죽음에 대한 미학적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외국의 추모시설 네 곳을 소개한다.

네덜란드 오에르텐 지역의 나무 납골당. Archdaily.com
네덜란드 오에르텐 지역의 나무 납골당. Archdaily.com

네덜란드 오에르텐 지역의 나무 납골당

마을의 150년 된 묘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무덤들이 철거 위기에 놓였다. 갈 곳 없는 시신들과 새로 올 시신들을 위한 건축물 공모전에서 뷔센페녹 건축사무소의 나무 납골당이 선정됐다. 거친 오크나무 기둥을 그물망처럼 직조한 구조물 각 칸마다 유골을 안치한 나무상자를 수납할 수 있다. 칸막이 구조는 한국 납골당과 비슷하지만 나무 재질과 주변의 널찍한 숲 덕에 각박한 느낌이 없다. 벽 사이로 형성된 좁고 긴 복도는 도서관 서가처럼 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유리 천장을 통과해 들어오는 빛은 바닥에 고요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연면적 883㎡(약 267평)에 최대 1,200명까지 안치가 가능하다.

노르웨이 우퇴위아섬의 추모 링. ⓒ Martin Slottemo Lyngstad
노르웨이 우퇴위아섬의 추모 링. ⓒ Martin Slottemo Lyngstad

노르웨이 우퇴위아섬의 추모 링

2011년 7월 22일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이 노르웨이 오슬로 정부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노동당 여름캠프가 열린 우퇴위아섬에 총기를 난사했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베르겐 3RW 건축사무소가 추모시설을 설계했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소나무 숲 작은 빈터에 마련한 반지 형태의 철제 구조물로, 줄을 연결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모양새다. 가까이 다가가면 희생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진 것을 볼 수 있다. 애도의 감정을 매끈하게 절단된 철강 소재와 연결시킨 파격도 좋지만 지름 4m 안에 60명의 추도를 가능케 한 경제성 또한 놀랍다. 바닥에는 슬레이트를 깔아 휠체어를 탄 이들도 쉽게 찾을 수 있게 했다.

도심 가운데로 나온 추모의 조각. ⓒThomas sseries.
도심 가운데로 나온 추모의 조각. ⓒThomas sseries.

도심 가운데로 나온 추모의 조각

2013년 미국의 건축디자인사이트 디자인붐이 개최한 ‘죽음을 위한 디자인’ 공모전 수상작으로, 실제 지어지진 않았다. 납골당을 공공미술의 시각으로 접근, 조각의 형태로 바꿔 도심 한 가운데 배치한다는 아이디어가 눈에 띈다. 문제는 표면이 폐쇄된 조각의 형태라 유족과 망자가 대면할 수 없다는 것인데, 건축가는 내부에 조명 시스템을 구축해 가족이나 친구가 원할 때마다 고인이 위치한 곳에서 빛을 발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고대의 거대한 돌조각을 닮은 납골당은 공공디자인으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도시인들에게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교재 역할도 한다. 설계를 한 토마스 시리즈는 반짝이는 도심 납골당이 시끄러운 도시엔 명상을, 슬픔에 찬 유족에겐 위로를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일본 규슈 나카쓰 ‘바람의 언덕 화장터’
일본 규슈 나카쓰 ‘바람의 언덕 화장터’

일본 규슈 나카쓰 지역‘바람의 언덕 화장터’

화장하는 비율이 100%에 가까운 일본에서도 화장터는 혐오시설로 분류된다. 건축가 마키 후미히코가 1996년 설계한 화장터 ‘바람의 언덕’이 지어지기 전까진 모든 화장터가 그랬다. 바람의 언덕에는 화장터의 상징인 굴뚝이 없다. 재연소 버너가 달린 최신 화장로에서 연기와 악취를 완전히 정화해 배기구로 내보낸다. 화장로도 넉넉히 5개를 설치, 북적임 속에서 눈물콧물 쏟아내는 광경보다는 정적 속에 고인을 떠나 보내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초원 위에 비뚜름하게 지어진 특색 있는 건물과 부지의 60%를 차지하는 널찍한 공원,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만드는 조형물들로 인해 지역의 명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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