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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축구전쟁(7월14일)

입력
2017.07.1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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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지도. 구글 맵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지도. 구글 맵

미국 플로리다 우주기지를 이륙한 유인 탐사선 아폴로 11호가 달의 표면 ‘고요의 바다’(Tranquility Base)에 내리던 1969년 7월, 멕시코만 건너 중미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시민들은, 브라운관 속 달 표면처럼 황량한, 전쟁의 폐허 위에 서있었다. ‘축구 전쟁’이라는 조롱기 어린 이름으로 불리는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전쟁이 7월 14일 발발해 18일 정전 선언까지 약 100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해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예선에 맞붙은 두 나라는 1, 2차전을 각각 홈팀 승리로 마감했다. 온두라스에서 열린 1차전 때는 시민들이 엘살바도르 선수단 숙소 앞에서 밤새 축제를 벌여 잠을 설치게 했고, 2차전 엘살바도르 경기 땐 온두라스 선수단 식사에 설사약과 수면제가 섞여 제공됐다고 한다. 분위기가 과열되자 FIFA는 3차전(6월 27일)을 중립지대인 멕시코에서 개최했고,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입장객 숫자도 제한했다. 연장전 끝에 엘살바도르가 3대2로 승리하자, 온두라스는 국교 단절을 선언했고, 엘살바도르 공군이 온두라스 수도 공군기지를 선제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축구의 과열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고, 전쟁의 원인 역시 축구가 아니었다. 두 나라의 갈등과 불화는 엘살바도르 농민들이 대규모로 온두라스로 월경, 무단 경작을 하면서 시작됐다. 좁은 국토에 그나마 경작할 만한 땅은 극소수 지주계급이 독점해버린 상황이었다. 반면 온두라스는 인구는 적으면서 땅은 넓어 미개척지가 많았다. 전쟁이 발발하던 무렵 온두라스 내 엘살바도르 농민은 약 30만 명에 육박했고, 그들이 무단 점유한 땅이 온두라스 전체 농지의 약 20%에 달했다. 온두라스가 토지개혁법을 제정, 67년부터 무단점거 농지 환수 및 엘살바도르 농민 추방을 시작한 건 그래서였다. 엘살바도르 독재정부가 전쟁을 준비한 건 68년부터였다.

전쟁은 미국과 미주기구 등의 개입으로 나흘 만에 승패 없이 끝났고, 정전 이후로도 크고작은 충돌이 이어졌다. 두 나라가 국제사법재판소까지 개입해 평화협정을 맺은 건 1980년이었다. 그 사이 두 나라 농업 경제는 계속 악화했다. 69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엘살바도르는 1라운드 3전 3패로 본선 진출국 중 꼴찌로 탈락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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