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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입맛 따라 요동치는 공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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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입맛 따라 요동치는 공영방송

입력
2017.08.2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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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영방송은 몸살을 앓아왔다. 정부는 입맛에 맞는 사장들을 앉히기 위해 각종 술수를 썼고, 공영방송 구성원들은 이를 막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1987년 6ㆍ29 선언으로 정부의 언론 통제가 풀리기 전 군부정권 아래서 방송은 정권의 ‘나팔수’ 그 자체였다. 민주화 바람은 분위기를 바꿨다. KBS는 1988년 이사회 단독으로 서영훈 사장을 선출했다. KBS노동조합도 이 시기에 결성됐다. 시민사회계의 원로였던 서 사장은 노조와 대화를 통해 KBS를 문제 없이 이끌었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이 때 노태우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서 사장은 사퇴압박을 받게 된다. 정부는 ‘감사원의 특별감사’ 카드를 꺼내 들었고, KBS의 방만경영을 문제 삼았다. 서 사장이 사표를 제출했을 때 KBS노조 700여명은 “정부의 외압중단”을 요구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노태우 정권이 서영훈 사장 후임으로 보낸 인물은 서기원 사장이었다. 노조는 유신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서기원 사장의 임명을 반대했다. 노조의 출근 저지 항의에 출근길이 막힌 서 사장은, 경찰 300여명을 투입하며 맞불을 놓아야 했다. 노조는 조합원 4,0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 사장 퇴진과 방송 제작거부를 결의했다. 여기에 MBC와 CBS 노조까지 가세해 ‘동맹 제작거부’를 결의했다. 정부는 전경 3,000여명을 투입해 조합원 300명을 연행하는 초강수를 뒀다. 이 때의 ’KBS방송민주화투쟁’은 정권의 언론장악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는 데 성공했지만, 정권 입장에서는 ‘언론장악 교과서’가 됐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도 일명 ‘낙하산 인사’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의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박권상 사장이 임명된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출범 당시 정부조직개편 위원장을 맡았던 박 사장의 이력은 처음부터 KBS 구성원들에게 달가울 리 없었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특정 고교 위주의 정실인사, 뉴스의 보수ㆍ우경화 등의 이유로 노조의 퇴진 요구를 받았다. 박 사장은 임기 70일을 남기고 사퇴하고 만다.

노무현 정권 때 임명된 서동구 사장도 낙하산 논란으로 임명 한 달 만에 퇴임한다. 이후 노조와 시민, 언론단체로 구성된 ‘KBS사장 공동추천위원회’가 구성된다. 이들의 추천 공모를 통해 정연주 사장이 선임된다. 정권과의 친소 관계를 통해 손쉽게 언론사 사장이 되는 길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정 사장은 KBS역사에서 ‘비운의 사나이’라 불릴 정도로 안타까운 행보를 걷는다. 2008년 정권을 잡은 이명박 정부는 정 사장과 KBS를 옥죄기 시작한다. 적자경영 등의 이유로 감사원의 특별감사가 실시되고 누적적자, 방만경영 등으로 KBS에 손실을 입혔다며 KBS 이사회에 정 사장의 해임권고안을 전달했다.

2009년 8월 이사회는 정 사장의 해임안을 가결했고, 이를 저지하고자 했던 KBS 직원 일부는 이사회의 요청에 의해 진입한 사복경찰에 의해 진압당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당시 경찰 병력에 둘러싸인 채 KBS 본관을 걸어 나오던 정 사장은 “참담하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이던 시절 언론 특보 출신인 김인규 사장 역시 “낙하산 인사” “보은 인사”라는 노조의 반발에 맞서야 했다. 시사 프로그램 ‘추적 60분’의 4대강 사업 관련 방송을 취소하면서 노조의 강한 반발을 산다. 노조는 총파업을 통해 김 사장의 퇴진 투쟁을 벌였으나 관련 기자와 PD 13명을 무더기 징계하고 해고하면서 임기 내내 ‘문제적 행보’를 이어갔다.

KBS 사장 중 두 번째로 해임된 이가 길환영 사장이다. 길 사장은 2014년 세월호 참사의 대형 오보와 더불어 당시 김시곤 보도국장의 ‘청와대 보도 개입설’ 폭로로 인해 해임됐다. 현재 고대영 사장도 노조가 예고한 9월 초 총파업에 직면해 있다. 고 사장은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보도국장과 보도본부장을 역임한 이력부터 여론에 의해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최근 노조는 이인호 이사장의 500여회 관용차 사적 이용을 폭로하고 고 사장과 함께 배임혐의 및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 위반 혐의로 고소한 상태다.

MBC도 암흑의 역사를 피할 수 없었다. 1986년 임명된 황선필 사장은 청와대 공보수석 비서관 출신으로 ‘낙하산 논란’을 일으켰다. MBC노조는 가만 있지 않았다. 황 사장의 퇴진 요구가 일었고 그는 임기를 남겨두고 사퇴했다. 후임으로 들어온 김영수 사장 역시 ‘낙하산 인사’로 분류돼 노조의 출근저지 등 파업으로 물러나게 된다.

노태우 정권에서 임명된 최창봉 사장과 김영삼 정권에 의한 강성구 사장도 재임기간 동안 끊임없이 노조와 부딪혔다. 최 사장은 시사프로그램 ‘PD수첩’의 ‘농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편의 방영을 연기하면서 MBC 구성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당시 우루과이라운드가 타결된 뒤라 ‘PD수첩’은 농촌 사회의 현실을 담으려고 했으나 이를 막은 것이다. 노조는 파업을 통해 최 사장의 퇴진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노조위원장 등 2명이 해고됐다. 당시 손석희 아나운서 등 노조집행부가 구속되며 파국으로 치달았다.

강 사장도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의 연임 개입 의혹이 일면서 노조의 퇴진 요구를 받았다. 당시 노조위원장이었던 최문순(전 사장)을 해고하는 등 노조간부 6명이 징계를 받으면서 노사 갈등이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노무현 정권에 임명된 엄기영 사장은 정연주 사장처럼 정권 교체의 희생양이 됐다. 이명박 정부는 엄 사장이 방영한 ‘PD수첩’의 ‘광우병’ ‘4대강 사업’ 편을 두고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결국 엄 사장은 정부와 MBC 방송문화진흥회의 사퇴 종용을 이기지 못하고 퇴진하고 만다.

2012년 이명박 대선 후보 캠프 출신 김재철 사장의 등장은 ‘MBC의 침몰’을 예고했다. 김 사장은 취임하자마자 이전 사장들과 마찬가지로 ‘후 플러스’ 등 정권에 민감한 시사프로그램들을 폐지하기 시작했다. MBC 구성원들의 반발에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도를 높여 반대 세력을 격파했다.

자신에게 반기를 든 노조부터 손보기 시작했다. 장장 170일 파업을 주도했던 정영하 당시 노조위원장, 강지웅 사무처장, 이용마 홍보국장 등 노조집행부와 박성호 당시 기자협회장, 최승호 PD, 박성제 기자가 해직됐다. 5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복직의 꿈을 이루지 못한 상황이다.

김 사장의 전횡은 뒤이어 선임된 안광한 사장과 김장겸 사장에까지 미치고 있다. 김재철 사장 시절 안광한 사장은 부사장을 역임했고, 김장겸 사장은 보도국장, 보도본부장 등 요직을 거친 최측근 인사였다.

박근혜 정권 하에서 두 사장은 내부의 목소리를 철저히 묵살했다. 목소리를 내는 구성원들에게 부당 해고나 징계, 전보 조치가 가해졌다. 그들의 빈자리엔 ‘시용기자’라는 이름의 경력기자들을 채용했다. 이들에게는 노조 가입 등을 방해하며 재갈을 물렸고 지난 10년 동안 ‘바른 소리’를 차단했다.

최진봉 성공회대 교수는 “공영방송이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지배구조개선 밖에는 답이 없다”고 말했다. 공영방송 사장을 선임하는 KBS 이사회와 MBC 방문진의 구성을 개선하는 방송법 개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KBS 이사회는 여야 7대 4 구조이고, 방문진은 여야 6대 3 구조다. 현재 KBS 이사회를 7대 6 구조로 바꾸는 방송법 개정안이 국회에 올라가 있는 등 소유구조 개편안은 지속적으로 논쟁 중이다.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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