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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머리칼이야 곧 자라겠지

입력
2017.12.08 12:43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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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에 한 번꼴로 회사 근처 미용실에 간다. 2년 넘게 같은 미용실을 다니다 보니 전담 선생님도 생겼다. 내 머리를 맡아주는 선생님은 솜씨 좋고 민첩하고 목소리가 특히 예쁘다.

다른 이용객에게도 그러는지 모르지만 머리를 자르고 매만지는 동안 그녀는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한다. 사각사각 가위질 사이로 그녀의 목소리가 섞여 든다. 옆자리 손님에게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 머리 자르러 갈 때마다 단막극처럼 이어지던 목소리가 차곡차곡 쌓여 나는 그녀의 개인사까지 제법 많이 꿰뚫게 되었다.

이제 나는 그녀의 나이가 스물여덟 살이라는 걸 안다. 대학 때 만난 남자친구가 강원도 출신이라는 사실도, 연애 중 몇 차례 헤어졌다가 만나기를 반복한 사연도 안다. 내년 8월로 결혼 날을 잡은 이 커플은 지난 봄 상견례 장소를 정하면서도 한동안 투닥거렸다. 누가 효자효녀 아니랄까 봐, 대구 처녀와 강원도 청년이 서로 자기 고향을 상견례 장소로 고집했던 까닭이다. 둘 다 고집을 꺾지 않아 절충안으로 합의한 지역이 대전이라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키득거렸다.

연애사와 일이 단골 소재이던 그녀의 레퍼토리가 바뀐 건 지난 7월이었다. 샴푸를 하고 머리 자르기 위해 자리에 앉자마자 나에게 며칠 쉬러 갈 만한 해외여행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회사에서 일정기간 재직한 사원들을 대상으로 포상 여행을 보내 주는데 올해 그녀의 차례가 온 것이다. 들어보니 여행지 및 여행 기간에 대한 최종결정은 회사가 하는 눈치였는데 그녀의 궁리는 조금 다른 데로 나아갔다. 이번 여행에 주니어, 그러니까 헤어 디자이너인 자신을 보조하며 2년째 수련과정을 밟는 스물네 살의 수습생을 데려가고 싶어 했다. 충동적인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아주 낮게 속삭이기를, 주니어 동반에 필요한 비용은 몇 달 전부터 따로 모아놨다고 했다. 다만 이런 계획이 사내에서 예기지 못한 부작용을 낳지는 않을까, 그녀는 그 점을 걱정했다. 아직 주니어에게도 말하지 않은 꿍꿍이에 적잖이 감동했으나 섣불리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나는 원장님과 먼저 상의하는 게 좋겠다고 간단하게 조언했다. 9월 말 머리 자르러 갔을 때, 그녀는 경쾌한 가위질 사이로 원장님의 승인이 떨어졌으며 11월 하순으로 잡힌 5일간의 여행지는 태국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며칠 전 커트를 위해 찾은 미용실에서 두 여성을 다시 만났다. 열대과일의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나를 맞은 주니어는 샴푸하고 머리 말리는 10여분 동안 이번 여행의 환상적인 면모를 어떻게든 제대로 전달하고 싶어 콧소리 섞인 감탄사를 연발했다. 멋진 선배 만난 덕에 난생 처음 떠난 해외여행이었으니 왜 안 그럴까. 그리고 이제 헤어 디자이너 선생님의 여행담을 들을 차례였다. 흐뭇한 눈길로 주니어를 바라보던 그녀가 말했다. “저 지금 저 친구 덕을 톡톡히 보고 있어요.” 이야기인 즉, 여행 이후 몰라보게 밝아진 그 친구를 보고 놀란 원장님이 뒤늦게 주니어 동반에 들어간 비용 전액을 부담했다는 것이다. 경영자인 자신이 진작 알았어야 할 것을 이제라도 깨우치게 해 줘 고맙다는 덕담까지 하면서 말이다. 이번 일로 사내 포상제도 폭을 넓힐 예정이라는 전언이 더해졌다.

감동적인 스토리에 코끝이 찡해진 내가 그만 재채기를 했고, 그 순간 그녀의 가위가 내 앞머리 한쪽을 싹둑 잘랐다. 전문가의 섬세한 손놀림으로 부랴부랴 보수공사를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보니 지금 나의 헤어스타일은 드라마 ‘언터처블’에서 악마로 나오는 배우 김성균과 꼭 닮은 모양새이다. 올해가 가기 전까지는 이 꼴을 감수해야 할 머리를 매만지며 혼자 구시렁댄다. “흠, 세상 공짜가 어딨어. 감동의 값어치가 이렇게나 컸던 게야.”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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