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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미국이 보는 한국과 일본

입력
2015.03.1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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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ㆍ1857~1930)란 미국인이 있다. 1878년 예일대를 졸업하고 연방고등법원 판사를 거쳐 1901년부터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총독을 역임했다. 태프트는 1905년 일본의 귀족원 의원 가쓰라 다로(桂太郞ㆍ1848~1913)와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한 당사자이기 때문에 한국으로서는 잊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1904년 2월 8일 일본함대가 요동반도의 끝자락 여순(旅順)의 러시아 군대를 기습함으로써 시작된 러일전쟁은 1905년 9월 5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맺음으로써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 공방전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1만 1,100여명인데 비해 러시아는 7,400여명이었고, 1905년 3월 초의 봉천회전(奉天會戰)에서도 일본군의 전사자는 1만 5,000여 명인데, 러시아는 8,700여 명이었다. 러시아는 일본과 전투에서 진 것이 아니라 전쟁의 다른 이름인 외교에서 진 것이다.

이때 일본 첩보공작의 전설이자 훗날 한국 주차헌병대 초대 사령관이 되는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대좌는 막대한 공작금을 뿌렸는데, 심지어 러시아혁명의 도화선이 된 1905년 1월의 ‘피의 일요일 사건’에도 공작금이 흘러 들어갔다. 러시아 내부 분열 공작은 일본군의 직접 전투 못지않게 러시아를 약화시켰다. 이때 만일 러시아에 아카시 같은 공작원이 있어서 한국의 의병들에게 자금과 무기 등을 제공했다면 러일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내부의 혁명운동에 발목이 잡힌 러시아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 제의를 수락할 수밖에 없어서 1905년 8월 18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강화회담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강화회담이 열리기 한 달 전인 1905년 7월 미국 대통령 특사인 육군장관 태프트가 필리핀 방문 길에 일본을 찾아 가쓰라와 밀약을 맺은 것이다. 한쪽 당사자와 밀약해놓고 중재를 자청한 미국의 행위는 외교적 사기였다. 그래서 지금도 러시아는 미국을 절대 믿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은 러시아와 장기전으로 가면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러시아를 기습하던 1904년 2월 루스벨트 대통령의 하버드 동창생이자 귀족원 의원인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를 특사로 보내 미국의 중재를 부탁했고, 그 결과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포츠머스 강화회담이란 사기극으로 이어진 것이다.

1905년 4월 8일 일본 각의(閣議)는 이미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한국에 주차관(駐箚官ㆍ통감)을 두어 한국의 시정을 감독하겠다’는 내용의 한국 점령 방침을 확립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며 극동 평화에 직접적으로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고 확인해주고 필리핀을 챙겼다. 1924년 미국의 역사학자인 타일러 데닛(Tyler Dennett)이 루스벨트 대통령 관련 문서들을 열람하다가 이 밀약 각서를 발견해 ‘커런트 히스토리(Current History)’에 발표하기 전까지 전 세계를 속인 비밀이었다.

그런데 이 시대적 사기극으로 루스벨트는 1906년 노벨평화상을 거머쥐었고, 윌리엄 태프트는 2년 후 루스벨트의 추천으로 공화당 후보로서 제27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국이 이미 한국을 일본에 넘긴 줄 몰랐던 고종은 헐버트(1863~1949)를 특사로 삼아 미국의 도움을 간청하는 구애외교를 계속 펼쳤다. 청나라 및 러시아에 대한 짝사랑에 이은 미국 짝사랑이었지만 그 결과는 늘 참담했다.

웬디 셔먼 미 국무차관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피해자인 한국과 가해자인 일본을 함께 비난하는 것으로 가해자의 손을 들어준 데 이어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국무부 영사국 등이 홈페이지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포기하거나 독도를 사실상 일본영토로 표기한다는 사실 등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웬디 셔먼은 한국과 일본을 바라보는 미국의 전통적 시각을 드러낸 것뿐이다. 현 상황에서 한국이 북한·중국·러시아와 분쟁을 겪는다면 미국은 국익에 따라 한국을 지지할 것이다.

한국이 일본과 역사관이나 영토 같은 근본 문제를 가지고 분쟁한다면 어느 편을 들 것인가? 한 세기 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지금의 CIA와 국무부 영사국의 홈페이지는 그 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고종의 오판에서 아무런 역사적 교훈을 얻지 못한 한국인들만의 짝사랑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지만.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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