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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탕 정치판서 오롯이 빛난 필리핀 피플파워의 상징

입력
2015.10.2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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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변호사 출신

민생 관련 변론 주로 맡다가

마르코스 대통령 계엄 선포하자

위헌소송 제기 등 독재에 맞서

1986년 '피플파워' 선봉에

민중저항으로 독재 몰아내고 새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돼

아시아 곳곳 민주운동에 영향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무소속으로 하원의원에 당선

회기 개근, 세금 아껴 청렴 실천… 21년간 '스크루지' 타이틀 유지

[1927. 1. 5 ~ 2015. 10. 5] 1986년 필리핀 피플파워 혁명의 주역인 인권변호사 출신 정치인 조커 아로요는 필리핀 유권자의 자존심이자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는 21년간 상ㆍ하원의원을 지내는 동안 무소속을 고집하며 필리핀의 고질인 파벌ㆍ문벌정치에 맞섰고, 신화적인 청렴함으로 부패 정치의 대안을 보였다. (자료사진) ●조커 아로요 페이스북에서.
[1927. 1. 5 ~ 2015. 10. 5] 1986년 필리핀 피플파워 혁명의 주역인 인권변호사 출신 정치인 조커 아로요는 필리핀 유권자의 자존심이자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는 21년간 상ㆍ하원의원을 지내는 동안 무소속을 고집하며 필리핀의 고질인 파벌ㆍ문벌정치에 맞섰고, 신화적인 청렴함으로 부패 정치의 대안을 보였다. (자료사진) ●조커 아로요 페이스북에서.

인권운동가가 직업 정치인이 되는 예는 흔하다. 시절이 달라져 고위 관료로 임명되기도 하고, 선거에 출마하기도 한다. 그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지만, 존경 받던 인권운동가가 존경 받는 관료나 정치인으로 살아남는 예는 흔치 않다.

사람이 아니라 정치판이 문제라는 이들도 있다. 용기만으로 헤쳐나가기엔 현실 정치의 난맥이 복잡하고, 소신을 지키기엔 정당정치의 장악력이 강하고, 정치(적 판단이)라는 게 운동가 시절처럼 독재-반독재나 부패- 반부패의 비교적 선명한 선악의 두 갈래 길만 마주치는 게 아니라는 게 이유라고들 한다. 존경이나 보람 같은 것과는 다르고 부나 권력처럼 뻔히 보이는 것들과도 또 다른,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희열 혹은 중독적 유혹들이 거기 있다고도 한다. 명망 있는 지식인이나 사회 운동가가 정치가나 관료가 되고자 할 때 기대감의 한 켠에 당혹감과 불안감이 껴드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필리핀 인권변호사 조커 아로요(Joker Arroyo)가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됐을 때 그런 우려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국제인권감시기구(HRWㆍHuman Rights Watch) 법률정책 감독관 제임스 로스의 생각은 달랐다. “피플 파워로 정권이 교체됐지만 좌파 성향 권력을 적대시하는 강력한 군대가 아키노 정부 뒤에 도사리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로요는 그 지뢰밭 같다는 정치판, 그것도 소설가 시오닐 호세(1924~)가 “근대적 나라(country)이지만, 아직 국가(nation)는 아니”라고 평한 필리핀의 정치판에서, 소신과 명예를 넉넉히 지켜낸 정치인이었다. 국민을 고문ㆍ암살하다 쫓겨난 독재자의 자녀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부정 축재와 사치와 전횡으로 세계인의 조롱을 받은 독재자의 부인이 다시 선거로 당선되는 필리핀 정치판에서, 조커 아로요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필리핀 유권자의 자존심이자 86년 ‘피플 파워’의 상징이었다. 그가 10월 5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86년 마닐라 EDSA 피플파워 혁명 당시 시민들의 시위 장면.(자료사진) ●조커 아로요 페이스북에서.
86년 마닐라 EDSA 피플파워 혁명 당시 시민들의 시위 장면.(자료사진) ●조커 아로요 페이스북에서.

미국의 좌파 정치학자 조지 카치아피카스(George Katsiaficas)는 ‘아시아의 민중봉기’(원영수 옮김, 오월의 봄) 모두에 시오닐 호세의 저 말을 인용했다. 호세는 400년 가까운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배의 끝을 두고 저렇게 평했지만, 카치아피카스의 책을 읽다 보면 2차 대전 일본 침략과 친일파 마누엘 로하스로 출범한 20세기 공화국 역사 내내, 스무 개 남짓 되는 전통 대지주 집안이 국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전 인구의 3/4이 빈곤선에 머물러 있던 마르코스 체제에 이르기까지, 호세의 평가가 유효하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그 끝에 터져 나온 민중 저항이 86년 마닐라 에피파니오 델로스 산토스대로(EDSA)를 가득 메운‘피플 파워’혁명이었다. 필리핀 시민 봉기는 (물론 앞서 80년 광주항쟁이 있지만) 한국의 87년 6월 항쟁과 타이완의 38년 계엄통치 종식, 88년 버마 26년 독재자 네윈의 하야(88년), 89년 티베트인의 저항, 90년 방글라데시 네팔 봉기 등 아시아 민중봉기로 확산되는 신호탄이었다고 카치아피카스는 분석한다. 그 ‘피플 파워’혁명의 선봉에 조커 아로요가 있었다.

그 전까지 아로요는 그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던 듯하다. 그는 마닐라 남동쪽 남카마리네스 주 나가 시에서 1927년 1월 5일 태어났다. 고향에서 중등학교까지 마친 그는 필리핀대학과 마닐라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우등생 모임인 ‘입실론 시그마 파이(Upsilon Sigma Phi)’ 회원이었고, 교지 편집인이었고, 논쟁ㆍ웅변 동아리 대표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53년 변호사가 된 뒤 72년까지 약 20년 동안의 그의 이력을 두고, 필리핀 국내외 언론들은 “서민ㆍ빈민 변론을 주로 맡은 인권 변호사”라고만 소개하고 있다. 그 무렵 그는 굵직한 정치적 사건보다는 민생 관련 변론을 주로 맡았던 듯하다. 70년 마르코스 정부에 의해 공산주의 선동 혐의로 추방 명령을 받은 한 중국계 상업신문 발행인을 변론한 일이 그나마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가 반독재 인권 변호사로 도드라지기 시작한 것은 72년 9월 마르코스의 계엄령 선포 직후였다. 헌법 효력이 정지됐고, 정당 활동이 금지됐고, 수많은 정적과 지식인 언론인 학생이 줄줄이 투옥되던 때였다. 그 살벌한 시기에, 변호사 조크 아로요는 마르코스의 비상계엄 ‘성명 1081’이 1935년 헌법에 위배된다며 법률 소송을 제기했다. 대통령 연임 제한 규정을 폐지한 73년 계엄 헌법과 대통령 비상대권 강화, 대통령의 법률 제정권한 부여, 군사법원의 시민 재판권 등 계엄 통치에 대해서도 잇따라 맞섰다. 공화국의 입법 사법 행정 전권을 휘어 쥐고 군부까지 장악한 무소불위의 독재자에게 아로요의 저 소송은 가소로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법률가로서 오직 법 절차에 따라 독재자의 통치 행위를 법정에 세우려 한 그의 기품 있는 용기는 필리핀 시민들과 국제 사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물론 당시의 그도, 누구도, 마르코스의 계엄령이 근 10년간, 1981년 1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필리핀을 방문하기 직전까지 지속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계엄 시기 그는 베니그노 아키노 2세(1932~1983) 전 상원의원과 방송인 유제니오 로페즈(Eugenio Lopez, 1901~1975), 필리핀 공산당 창당 주역인 호세 마리아 시손(Jose Maria Sison, 1939~) 등 수많은 정치인과 반정부 인사들을 도맡아 변호했다. 파업 농성장과 시위대 맨 앞에 서서 최루탄과 곤봉에 맞아 부상당하고 입원하고 허다하게 연행도 당했다. 그 무렵 그는 필리핀의 대표적 반독재 인권 투사였다.

1980년 그는 민주주의를 위한 변호사 모임인 ‘우애와 통합, 민족주의를 위한 변호사 운동(MABINIㆍMovement of Attorneys for Brootherhood, Integrity and Nationalism Inc.)과 공익변호사그룹 ‘FLAG(Free Legal Assistance Group)’를 설립한다. 필리핀의 80년대 초는 좌파 게릴라 모로민족해방전선(MNLF)과 필리핀 공산당(CPP) 신인민군(NPA)의 군사력이 정부군을 위협하던 시기였고, 마르코스 정부에 염증을 느낀 일부 정부군 장교들이 자체 군 개혁운동(RAM)을 벌이던 때였다. 필리핀 경제는 오랜 정치 불안과 마르코스 일가의 축재 및 부채 위기로 한계상황으로 치달았다. 미 국무부가 마르코스 체제의 미래에 불안감을 품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위 책 85쪽) 아로요 등이 만든 두 단체 특히 ‘마비니’는 훗날 시민항쟁을 이끈 중추 전력 가운데 하나가 된다.

80년 미국으로 망명했던 베니그노 아키노가 83년 8월 21일 귀국 도중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암살 당한다. 저격범은 현장에서 사살됐고, 이듬해 중립조사위원회는 당시 군 참모총장이 사주한 범행으로 결론 지었다. 하지만 필리핀 국민들은 배후가 마르코스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의 장례식을 기점으로 시위와 파업 등 정국 혼란이 극에 달했다. 83년 10월 필리핀 정부는 국제 금융기구의 부채 상환 중단을 선언했고, 외자 감소분을 충당하기 위해 국립은행은 화폐 공급을 늘렸다. 훗날 공개된 바, ‘마르코스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미 국가안전보장회의의 비밀 지침이 작성된 것은 84년 11월이었다.

86년 2월 조기 대선은 사실상 마르코스의 친위 쿠데타였다. 그는 선거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재확인하고 미국의 지지를 회복할 심산이었다. 상대는 베니그노 아키노의 부인 코라손(코리) 아키노(1933~2009)였다. 아키노 뒤에는 하이메 신 추기경의 필리핀 가톨릭 교회와 시민운동 연합인 ‘전국자유선거시민운동(NAMFREL)이 있었고, 그의 곁에는 조커 아로요가 있었다. 마르코스의 선거부정 당선과 피플파워 혁명, 군부의 반 마르코스 선언…. 코리는 2월 25일 대통령(임기 86~ 92년)에 취임했고, 마르코스는 다음날 미국 하와이로 망명했다. 코리는 아로요를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하지만 아키노 정부의 통치가 아로요의 뜻 같지는 않았다. 핵심 공약이던 토지 개혁(아키노 가문 역시 대지주다)은 실패했고, 정적 박해와 암살, 특히 좌파에 대한 탄압과 인권 침해는 마르코스 때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아로요는 전통 정치권력인 지주계급의 비토, 특히 정권 출범 직후 정치범으로 투옥돼있던 호세 마리아 시손을 석방한 데 따른 정치 공세에 시달렸다. 아로요는 18개월 만에 해임됐고, 86~90년 필리핀 중앙은행장과 아시아개발은행 상임이사를 맡아 외채 협상 등 붕괴된 금융시스템 복원에 힘을 보탰다.

아키노 정권 마지막 해인 1992년, 아로요는 마닐라 위성도시 마카티 1선거구 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80%의 지지율로 당선됐다. 그의 선거 구호는 타갈로그어로 ‘PAG BAD KA, LAGOT KA’. 필리핀 관광청에 따르면 ‘잘못에 책임을 묻자’‘인과 응보’쯤의 의미다. 2001년까지 하원의원 9년, 2013년 은퇴하기까지 상원의원 12년의 21년 동안 그는 한결같이 무소속으로 남았고, 자신의 선거 약속을 지켰다.

그가 무소속을 고집한 까닭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필리핀 정치의 고질인 가문 중심의 파벌로부터, 돈과 무력(특히 사병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다. 그가 2000년 11월 영화배우 출신의 조셉 에스트라다(Joseph Estrada, 98~2001 재임) 대통령을 부패 혐의로 탄핵한 것도, 11명의 의회 특별검사 팀의 리더로 추대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전국에 TV로 방영된 상원 탄핵 청문회에서 그는 “우리는 그와 같은 도둑이 국가를 운영하도록 두고 볼 수 없다”고 일갈했다. 이듬해 1월 탄핵 선고 직전 에스트라다는 사임했고, 잇따라 드러난 부패 혐의로 2007년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필리핀 국민들은 변호사로서, 무소속 의원으로서, 두 대통령을 심판한 아로요를 ‘외톨이 총잡이(Solitary Gunfighter)’라고 불렀다.

의원 시절 그가 남긴 기록은 가히 신화적이다. 그는 하원의원 시절 회기 중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개근했고, 21년간 단 한 번도 국고 보조로 해외 여행을 하지 않았다. 운전기사와 비서, 법률보좌관 등 단 세 명의 스태프만 두고 일했고, 때로는 운전기사에게 비서 업무를 겸하게 하기도 했다. 공적ㆍ사적 일정을 직접 챙겼고, 연설문도 대부분 직접 썼고, 007 서류가방(아타셰 케이스)을 늘 직접 들고 다녔다. 왜 보좌관을 적게 두느냐는 질문에 그는 “내 스태프들이 아주 유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인콰이어러, 2004. 2.16), 세금을 아끼기 위해서라는 건 누구보다 유권자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선거구 유권자 선심용으로 쓸 수 있는 연 2억 필리핀 페소의 ‘지역개발자금’을 한 푼도 쓰지 않으면서, 단 한 번도 선거에서 패배한 적 없는 정치인이었다. 86년 대통령 비서실장이 될 때 공개한 개인 재산 항목과 액수가 정계 은퇴할 때까지 거의 달라지지 않았을 만큼 그는 자신에게 엄격했다.(CNN필리핀, 15.10.7 등)

2014년 의회 회계위원회(COA)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직전 회계연도 동안 3,492만7,000페소(약 8억5,700만원)를 써서 21년 연속 ‘올해의 스크루지(Scrooge of the Year)’타이틀을 지켰다. 대다수 의원들의 지출액은 4,000만~6,000만 페소 대였다.(Philstar, 2014.2.18) 상원 윤리위원회 격인 ‘블루리본 위원회’의장이던 2001년 그가 쓴 돈은 813만 페소였는데, 대부분 스태프의 급여와 회의 비용, 사무실 비품 구입비였다.(inquirer, 2004.2.16)

하원 시절 그는 마르코스의 1,500억 페소에 달하는 은닉 재산 추적 조사를 주도했고, 중앙은행법 개정에 반대해 3,000억 페소의 세금 낭비를 막는데 기여했다. 그는 사형제에 반대했는데, 1926~72년 사이 78명의 사형수 가운데 71명이 빈민이어서 적절한 법적 조력을 받지 못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국영 석유회사 민영화에 반대했고, 기업에 유리한 세제 개편안에 반대했다.(www.10fingersdesigns.com/joker) 물론 그의 입장이 늘 법의 결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말년의 그는 상원 블루리본 위원회와 정의ㆍ인권위원회 의장으로 일했고, 2013년 6월 은퇴 후 미국서 심장 수술을 받고 투병했다. 상원 의장 프랭클린 드릴론은 10월 8일 필리핀 일간 인콰이어러 인터뷰에서 “유족이 의회장을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전달해왔다”며 곤혹스러워했다. 의사당 마당에는 다만 조기(弔旗)가 내걸렸다. 한때 그의 변론 고객이기도 했던 르네 사귀삭(Rene Saguisag) 전 상원의원은 “아로요가 당대의 전설에서 영원한 전설이 됐다”(ABS-CBN NEWS)며 애도했고, 랄프 렉토(Ralph Recto) 상원의원은 “필리핀의 자유는 그에게 큰 빚을 졌고, 수많은 이들이 누린 자유 역시 그의 덕으로 가능했다”고 말했다.(인콰이어러, 2015.10.8) 마르코스의 아들이자 동료 상원의원인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도 트위터에 “상원에서 그와 더없이 값진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 만났지만, 여러 정치적 문제에서 뜻을 같이 했고, 마침내 친구가 됐다고 자부한다”고 썼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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