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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나치 만행 기억은 독일의 영원한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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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나치 만행 기억은 독일의 영원한 책임"

입력
2015.01.2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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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폴란드 남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된 청소년들이 1945년 1월22일 철조망 앞에 서 있다. 왼쪽에서 일곱 번째는 언니와 함께 붙잡혔다 가까스로 살아 남은 마르타 비제다. AP 연합뉴스
악명 높은 폴란드 남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된 청소년들이 1945년 1월22일 철조망 앞에 서 있다. 왼쪽에서 일곱 번째는 언니와 함께 붙잡혔다 가까스로 살아 남은 마르타 비제다. AP 연합뉴스

“나치 만행을 되새겨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이다.”(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유대인 600만명 대학살의 상징인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27일 해방 70돌을 맞았다. 메르켈 총리는 전날 베를린에서 열린 7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독일은 수백만 (유대인)희생자에 대한 책임을 잊어선 안 된다”면서 “아우슈비츠는 항상 인간성 회복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일깨운다”고 말했다.

메르켈은 “아우슈비츠는 또한 독일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는 이들(이민자들)을 적대시하는 구호를 따르지 말 것을 경고한다”면서“자유, 민주주의, 법치는 항상 각성과 헌신을 요구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각별히 유대인 10만 명이 독일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거론하며 이들이 오늘날까지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이스라엘 출신이라는 까닭으로 모욕당하고 공격받거나 위협받는 것은 독일로서는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라고도 했다. 메르켈 총리는 나아가 “종교와 인종에 관계없이 모두가 자유로워야 하고 안전해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독일은 이날 메르켈 총리의 연설 외에도 정치권 전체가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을 기념하며 나치 만행의 역사를 모두가 기억하며 반성했다. 연방의회에서 열린 별도의 기념행사에서 연정 다수당인 기독교민주당(CDU)의 페터 타우버 사무총장은 “우리는 나치 만행과 독재 체제를 기억해야만 한다”면서 “특히 어려서부터 인종주의와 전체주의를 인식할 안목을 갖게끔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녹색당의 지모네 페터 당수는 “나치 범죄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독일 사회 전체의 집단적 책임”이라며 최근 고개를 드는 인종주의, 반유대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가세했다.

전세계적으로 아우슈비츠 해방 70년을 추모하지만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는 생존자들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날 아우슈비츠 오시비엥침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참여한 생존자는 300여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90대의 고령이며 일부는 100세를 넘겼다. 10년에 한 번씩 기념행사를 열어온 피오트르 치빈스키 아우슈비츠박물관장은 “생존자 다수가 모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10년 전인 60주년 행사 참석자 1,500명에 비해 70주년 행사 참가자 수는 20%로 급감했다.

26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베를린=AP 연합뉴스
26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베를린=AP 연합뉴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1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대인과 함께 동성애자와 폴란드 포로, 집시 등도 함께 희생됐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가스실과 화장터, 300개의 공동막사 등의 주요 시설 대부분이 지금까지 보존돼 있다. 나치는 패전 직전 집단학살 증거를 없애려고 1945년 3월 수용자 5만8,000명을 엄동설한에 ‘죽음의 행진’으로 내몰았으며 소련의 ‘붉은 군대’가 아우슈비츠를 해방시켰을 때는 걸을 힘도 없는 노약자 7,000명만 발견됐다. 당시 남자 옷 37만벌, 여자 옷 83만7,000벌, 사람 머리카락 7.7톤이 발견돼 나치의 잔혹함이 그대로 드러냈다.

70년이 흘렀지만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은 끔찍했던 당시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1944년 3월 슬로바키아의 작은 도시에 살던 헝가리계 유대인 소녀 에디트 에바 에드가는 집에 들이닥친 나치군에 의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 곳에서 에드가는 일명 ‘죽음의 천사’라 불리는 요제프 멩겔레 박사와 마주쳤다. 그는 가스실로 보낼지, 아니면 생체실험용으로 살려둘지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에드가의 부모는 독가스실로 끌려가 죽음을 맞았고, 홀로 남은 17세의 발레리나 에드가는 멩겔레 박사를 즐겁게 하기 위해 요한 슈트라우스의 ‘푸른 다뉴브강의 왈츠’ 음악에 맞춰 춤을 춰야 했다고 CNN에 출연해 아픈 과거를 털어놓았다.

체코슬로바키아에 살았던 마르타 비제는 아우슈비츠 6곳의 수용소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았던 비르케나우 캠프 생체실험 건물에서 언니와 두 달을 살았다. 비제는 언니와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질이 주입된 주사를 맞았고 언니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났다. 1948년 가족과 함께 호주로 간 비제는 부모님이 전쟁 이야기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고 자신과 언니도 1995년까지 아우슈비츠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을 정도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프랑스에 살았던 라파엘 에스라엘은 아우슈비츠와는 또 다른 죽음의 공포를 맛봐야했다. 그는 다른 수용 시설로 옮겨지기 위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기차로 이동해야 했다. 수감자들은 나무신을 신고 빙판 위를 걸었고 옷은 금방 헤져나갔다. 몇 시간도 안 돼 그들 모두 맨발이 됐고 걸을 때마다 빙판에 발이 달라붙어 피를 흘렸다. 에스라엘은 어머니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살아남았지만 할머니와 친인척 수십여 명은 독가스실에서 숨졌다.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을 이틀 앞둔 25일(현지시간) 정통 유대교인들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야드 바셈)을 방문해 전시물을 살펴보고있다. 예루살렘=UPI 연합뉴스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을 이틀 앞둔 25일(현지시간) 정통 유대교인들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야드 바셈)을 방문해 전시물을 살펴보고있다. 예루살렘=UPI 연합뉴스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0년 후 인간의 문명은 혜성에 우주탐사선을 안착시킬 만큼 진보했다. 하지만 인류는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다른 인종이나 종교, 성적 소수자 등을 억압하고 학살하고 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인류가 아우슈비츠의 비극에서 배운 것이 없다”고 탄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제는 최근 파리 테러 후 “그 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고 힘주어 말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사는 생존자 안나 오른슈타인(87)은 “홀로코스트는 단지 인종말살 정책의 시작일 뿐”이라며 “캄보디아, 보스니아, 르완다, 그리고 무슬림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행진이 펼쳐진 홀로코스트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집시였던 헤르만 횔렌라이너는 “70년 후에는 세상이 변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차별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에스라엘은 아우슈비츠에 수용소에서 ‘어떻게 인간이 타인에게 그토록 잔인할 수 있는가’하고 자문했었지만 파리 유대인 식료품점 테러 후 같은 질문을 또 하고 있다.

생존자들은 수용소에서 죽음보다 더한 공포와 인간이 지닌 끔찍한 야만성을 경험한 트라우마로 한평생 상처를 받고 살아 왔다. 아우슈비츠가 해방된 지 70년이 됐지만 인류는 여전히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야 한다는 숙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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