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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은행에 맡긴 돈은 정말 안전할까

입력
2015.01.22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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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왜 고모들이 준 돈을 엄마가 가져가요?”(뜨끔)

“네 이름으로 된 통장에 예금하려고 그러지.”

“예금이 뭔데요?”

“은행에 돈을 맡기는 거야.”

“은행이 뭔데요?”

“돈을 집에다 두면 잃어버릴 수도 있고 도둑이 훔쳐갈 수도 있잖아. 그래서 은행에 맡기면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불려주기도 해.”

호기심 많은 둘째 아이의 질문 공세에 대답을 해 주다 나도 모르게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로 은행이 돈을 안전하게 보관해 주는 곳 맞아?’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전남 광양에선 지역농협 계좌에서 평생 모은 돈 1억2,000만원이 주인도 모르는 새 빠져나가는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인출 내역을 확인하니 3일 동안 한밤중에 텔레뱅킹으로 299만원, 298만원씩 총 41차례에 걸쳐 돈이 인출됐다. 피해자의 전화번호로 걸려온 전화인 것처럼 위장했지만 그 시간 피해자의 전화내역을 보면 전화를 한 적 없다.

이런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은행의 입장은 간단하다. “피해자가 보안카드를 유출하지 않았다면 범인이 그렇게 정확하게 보안카드 번호를 입력할 수 없다. 우리 책임이 아니다.” 농협이 아니라 다른 은행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어도 마찬가지 반응일 것이다.

사고 피해자는 보안카드를 유출한 적 없다고 주장하지만 설사 피해자의 실수로 유출됐다 하더라도 정말로 은행의 잘못은 없을까. 애초에 보안에 구멍이 숭숭 뚫리도록 설계한 은행의 책임이 전혀 없느냔 말이다.

보안카드는 이름 자체가 아이러니다. 명함 크기 카드 한 장. 몰래 적든 휴대폰 카메라로 찍든 손쉽게 입수할 수 있고 일단 입수하면 모든 거래가 가능하니 오히려 '보안 파괴 카드'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 스마트폰으로 보안카드 사진을 찍어 보관하는 사람도 있다. 금융기관은 이들의 보안 의식을 탓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의 의식수준이 같다고 가정하면 안 된다. 은행이 수년 전 보안카드를 싹 없애고 일회용 비밀번호(OTP) 기기를 모두 배포했다면 그 동안 엄청난 금액의 금융사기 거래가 예방됐을 것이다.

텔레뱅킹 역시 보안에 극도로 취약하다. 텔레뱅킹 사용자들은 대부분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장ㆍ노년 층이므로 보안카드를 쓴다. 전화를 걸고 보안카드 번호만 입력하면 되니 참으로 편리하지만, 불안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이다. 사전에 등록한 전화번호로 걸려온 전화로만 텔레뱅킹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는 아예 실소가 나온다. 발신자 번호조작은 너무나 쉽기 때문이다. 해외에서는 중요한 거래를 전화로 할 경우 받은 측이 일단 끊고 걸려 온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어서 전화번호의 유효성을 판단하는 식으로 상대방을 확인한 후 거래한다.

한밤중에 300만원씩 41차례나 돈이 빠져나가는 것은 평범한 인출 패턴과는 매우 다른데 이런 '수상한 거래'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도 큰 문제다. 농협이 이를 감지하고 차단하는 '이상거래감지시스템(FDS)'을 일찌감치 도입했더라면 피해자의 돈이 바닥까지 빠져나가기 전에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농협은 지난해 12월16일에야 FDS를 도입했는데, 여전히 “금융감독원이 2014년 말까지 FDS를 도입하라고 해서 일정에 맞춰 도입한 것일 뿐 그 전에 발생한 이상거래를 탐지 못한 것이 우리 잘못은 아니다”란 입장이다. 하지만 애초에 국내 은행들이 고객의 돈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중요시해 왔다면 금감원의 지시 없이도 벌써 오래 전에 도입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해외에서 FDS의 탐지 능력은 금융회사의 핵심 역량에 속한다. 반면 국내 금융회사들은 금감원 기준만 지키면 보안사고의 책임이 전혀 없는 것처럼 입장을 취해 왔다. 덕분에 인터넷뱅킹 이용자들은 안티바이러스 백신과 공인인증서, 방화벽, 키보드 보안 프로그램 등 이른바 ‘액티브X 보안 4종 세트’를 설치하느라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전혀 다른 경로에서 개인정보 유출과 금융사기 피해를 입어 왔다. 과연 “은행은 돈을 안전하게 보관해주는 곳이야”라고 딸에게 말해도 어색하지 않을 날이 오기는 할까?

최진주 디지털뉴스부 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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