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女權) 최후의 불모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첫 선거가 12일(현지시간) 진행됐다. 이날 오전 8시부터 시작된 284개 지방의회 의원 2,106명을 뽑는 지방선거에서 사우디는 여성 유권자의 투표와 여성 후보의 출마를 역사상 처음으로 허용했다. 아직도 여성의 자동차 운전을 금지할 정도인 사우디가 여성을 시민으로 인정하는 선거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랍의 봄’의 바람이 거셌던 2011년 당시 국왕인 고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2015년부터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라”고 유언을 남긴 덕분이다. 사우디는 1893년 뉴질랜드가 여성 투표권을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인정한 이후 끝까지 이를 외면해 온 중동지역에서도 카타르(1999년), 오만(2003년), 쿠웨이트(2005년), 아랍에미리트(2006년), 부탄(2008년)에 이어 120여 년 만에 여성에게 선거의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이날 영국 BBC와 AP 등이 전한 사우디 여성들의 선거참여 풍경을 보면 진정한 민주주의의 도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했지만, 불공정 경쟁을 치러야 하는 여성 후보자와 얼굴을 감싼 채 남성이 운전하는 차를 기다려 투표소로 나서는 여성 유권자들의 현실을 보면 남녀평등을 향한 길은 여전히 험난한 것 같다. AP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 출마한 여성은 모두 979명으로 남성 후보자(5,968명)에 비해 수가 크게 적다. 투표를 위해 사전등록한 유권자 여성은 18세 이상 여성의 2%인 13만여명에 불과한 수준이다. 사전등록한 유권자 남성(135만6,000여명)과 비교해서는 10분의 1 정도이다. 제도는 시행됐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에 부딪혀 출마와 투표를 포기한 여성이 적지 않아 보인다.
50대 주부 샤라 알 카타니는 이슬람 전통의상인 아바야 얼굴과 몸을 가린 채 수도 리야드의 한 여성 전용 투표소를 찾았다. 사우디 정부는 이날 전국 1,263개 투표소 가운데 424곳을 여성 전용으로 운용해 남녀가 구별된 장소에서 투표하도록 했다. 자녀 8명을 둔 알 카타니는 “여성의 투표 참여는 사우디 국민과 사회 모두에 큰 의미가 있다”며 “여성이 남성의 동반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라고 기뻐했다. 지방의원 후보로 나선 카리마 보크하리(50)는 “우리는 역사를 만들고 있으며 나는 방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썼다”라고 말하며 투표장을 나섰다.
BBC는 “남성이나 여성 모두 얼굴을 공개한 포스터로 유세를 할 수 없지만 남성은 여성과 달리 면대면 연설을 할 수 있어서 남성 목소리를 빌리거나 가림막 뒤에서 유세를 해야 하는 여성 후보는 매우 불리한 레이스를 치른 셈이다”고 평했다.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는 제도가 마련됐지만 오직 지역 이슈에만 관여할 수 있는 지방의원 선거 개혁만으로 여권 신장을 크게 기대할 수 없다는 지적도 많다. 특히 여성의 정치 참여를 부당하다 여기는 여론이 여전히 만만치 않다. 쿠란(이슬람경전)을 가르치는 여성 교사 암나 아흐메드(23)는 투표등록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집권자는 모두 남성이고 이들이 정책을 만들기 때문에 여성의 자리는 아직 없다고 생각한다”라며 “사실 남성이 선거에서 모두 이기길 바란다”고 말했다. 투표를 위해 줄을 선 압둘라 알 마이텝은 “여성은 가정을 운영하고 다음 세대를 키워야 한다”라며 “내 아내가 정치를 하도록 만들면 누가 아들들을 양육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사우디 국영 SPA 통신은 살마 빈트 히잡 알오테이비가 메카의 마드라카 의회에서 당선돼 첫 여성 당선자가 나왔다고 이날 전했다. 알오테이비는 다른 7명의 남성 후보와 2명의 여성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다.
양홍주기자 yanghong@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