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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대사에 돌 던지고 구의장 뺨 때리고… 과격행동 수차례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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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대사에 돌 던지고 구의장 뺨 때리고… 과격행동 수차례 전적

입력
2015.03.0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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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엔 청와대 앞 분신 시도, 독도지킴이 등 반일 활동 펼치다가

2006~07년 8차례 방북 이후 미군 철수 등 반미 활동에 매진

김기종씨가 지난 2010년 7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강연하던 시게이에 도시노리 주한 일본대사에게 시멘트 덩어리를 던진 뒤 강연장 밖으로 끌려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김기종씨가 지난 2010년 7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강연하던 시게이에 도시노리 주한 일본대사에게 시멘트 덩어리를 던진 뒤 강연장 밖으로 끌려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5일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습격한 ‘우리마당 독도지킴이’ 대표 김기종(55)씨는 이번 사건 이전에도 여러 차례 돌출 행동으로 과격성을 드러냈다.

김씨는 2010년 7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특별강연회에 참석한 시게이에 도시노리(重家俊範) 당시 일본대사에게 지름 약 10㎝와 7㎝인 시멘트 덩어리 2개를 던진 혐의로 구속됐다. 대사 옆에서 통역을 하던 3등 서기관이 이 시멘트 덩어리에 손을 맞는 부상을 당했다. 당시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며 영유권을 주장해 기분이 나빠서 그랬다”고 진술했고, 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김씨 변호를 맡았던 박찬종(76) 변호사는 “김구, 안중근, 윤봉길을 존경하고 민족주의적으로 활동한 사람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씨는 당시 테러를 미화하는 내용을 담은 책 ‘독도와 우리, 그리고 2010년’도 출간했다.

지난해 2월에는 서대문구 창천교회에서 열린 신촌 번영회 정기총회에 참석한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정치적인 질문을 했다가 명확한 답변을 받지 못하자 분에 못 이겨 서대문구의회 의장 변녹진(57)씨의 뺨을 때렸다. 김씨는 이 사건으로 상해죄로 기소돼 벌금 70만원을 선고 받았다. 또 같은 해 5월에는 일본대사관에 일본 정부의 집단자위권 주장을 규탄하는 항의서한을 전달하려다 제지당하자 경찰에게 신발과 계란을 투척해 입건되기도 했다. 2013년에는 신촌 벚꽃축제에 참석해 구청장 등에게 자신이 운영하는 풍물놀이 공연을 관철시키기 위해 난동을 피웠다. 지난 1월 30일에도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열린 아이돌 그룹 ‘엑소(EXO)’의 공연 행사에서 팬클럽 회원들과 시비가 붙어 행패를 부리다가 공무집행방해와 업무방해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김씨와 5,6년간 알고 지냈다는 한 주민은 “평소에는 온순하고 조용한 사람이지만 정권이나 정치 얘기가 나오면 갑자기 흥분하곤 했다”고 말했다.

5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과도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습격한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가 연행되며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5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과도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습격한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가 연행되며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분신시도를 한 적도 있다. 우리마당이 남북공동행사 ‘통일문화큰잔치’를 준비하던 88년 괴한들이 사무실을 습격해 여학생을 성폭행한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2007년 10월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다가 분신을 기도했다.

이런 독불장군식 행태로 인해 진보 시민단체들도 김씨와 거리를 뒀다고 한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김씨가 학생운동을 하다 고문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이후로 철저히 외톨이로 활동했다”고 전했다. 김씨를 관리한 적이 있는 한 경찰 정보관은 “맞불집회만 열리면 보수단체 참가자들과 싸우는 통에 진보진영에서도 꺼려하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전남 강진 출신으로 80년 성균관대 법대에 입학한 뒤 문화운동과 학생운동에 매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의 대학 후배인 새정치민주연합 유은혜 의원은 “김씨가 학교 다닐 때 문화패를 만들고 독도지킴이 운동을 했다”며 “일본대사관에 돌을 던지거나 분신하는 등 반복적으로 돌출행동을 해 신뢰감이 떨어졌다”고 평가했다.

김씨는 처음에는 반일 활동에 주력하며 민족주의 성향을 보였다. 2006년 5월 일본 시마네(島根)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하자 동료 6명과 함께 본적을 경북 울릉군 독도리 38번지로 옮겼다. 그는 97년부터 10년 동안 성공회대 교양학부에서 ‘전통 예술의 이해’를 주제로 강의도 했다.

김씨는 2006년 11월부터 2007년 4월까지 개성에 나무 심기 등 목적으로 8차례 북한을 방문하며 반미 활동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공안당국 관계자는 “김씨가 방북을 기점으로 확실한 반미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2013년 11월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사건 이후 실시한 5ㆍ24 조치의 무조건 해제와 천안함 사건 진실 규명을 위한 남북공동조사를 주장했다. 2014년 1월 열린 연평도 사태 재발방지 통일문화 토론회에서는 “남한의 자극으로 연평도 사태가 발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건 직전인 지난 2일에도 김씨는 페이스북에 한미 연합군사훈련인 키 리졸브ㆍ독수리훈련 때문에 한반도 분위기가 얼어 붙었다고 주장했다. 2006~2009년 통일부 장관이 위촉하는 통일교육위원을 역임한 김씨는 2001~2003년, 2005~2007년 두 차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또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당시 서울 도심에 논란이 된 분향소 설치에 관여하기도 했다.

김씨의 주변인들은 그가 최근 시민 운동에 대한 피로감을 자주 호소했다고 전했다. 80년대부터 김씨와 함께 문화운동을 해 왔다는 한 시민운동가는 “30년 넘게 운동에 매진하면서 실질적 성과가 나지 않자 정신적으로 힘들어했고, 경제적으로도 궁핍해 한계를 느낀 것 같다”고 했다.

김씨는 90년대 후반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의 한 4층짜리 건물 사무실 한 곳을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60만원을 내고 빌려 사무실 겸 숙소로 생활했으며 최근 4,5개월간 월세가 밀린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 사무실 인근 음식점 주인은 “얼마 전에는 발작을 일으킨 후 쓰러져 119 구급대에 실려 후송됐다”며 “후원금으로 생계를 이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안아람기자 oneshot@hk.co.kr

정준호기자 junho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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