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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미니스트다” 뜨거운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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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미니스트다” 뜨거운 바람이 분다

입력
2016.03.0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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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여성 특혜도, 남성 역차별도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적 상식이자 인권이다. 게티이미지뱅크
페미니즘은 여성 특혜도, 남성 역차별도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적 상식이자 인권이다. 게티이미지뱅크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즈음해 한국여성연합은 매년 ‘성평등 디딤돌’과 ‘걸림돌’을 선정한다. 그런데 성평등에 기여한 디딤돌 부문 2016년 수상자 중 하나는 이례적으로 사람이 아니다. 지난 1년간 SNS에서 활발하게 펼쳐졌던 ‘#나는 페미니스트다’ 선언운동이 그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마른 들판에 불길 번지듯 퍼져나간 ‘페미니스트 해시태그’ 운동의 주체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 인간임을 개개인의 자발적 의지로 선포한, 이름 모를 수많은 여성과 남성들이었다. 2015년 2월 10일 한 트위터 사용자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SNS라는 한정된 공간을 뛰어넘어 여성단체 회원으로 가입하거나 번개모임을 갖는 등 오프라인 행동으로 이어졌고, 트위터에 모인 선언 내용을 소책자로 제작해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우리가 겪은 차별과 불평등의 경험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 우리의 가까운 미래엔 페미니즘이 당연한 시민의 교양이 될 것. #나는 페미니스트다”, “19대 국회의 여성의원 퍼센티지가 15%밖에 안 된다는데 현재 필리버스터에서 힘을 보여준 혹은 보여줄 의원은 전체 중 여성이 반 혹은 과반수다. 이제 가녀리고 연약한 여성, 바깥일=큰일에 맞지 않는다는 말은 사라질 때가 됐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1년이 지났다. 세상이 변하진 않았지만 몇몇 사람들의 생각이 변했다. 이렇게 2년, 3년 계속 사람들이 변하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세상이 변하지 않을까. #나는 페미니스트다”.

지난 한 해를 뜨겁게 달궜고 여전히 뜨거운 바람이 멈추지 않고 있는 페미니스트 선언운동은 거대담론이 아닌 일상정치의 차원에서 변화의 든든한 단초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지난해를 한국 페미니즘 원년으로 다시 기록해야 할지도 모른다.

독버섯처럼 퍼진 여성혐오 “더는 못 참아”

지난해 봄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며 이슬람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에 가담한 ‘김군’과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씨의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칼럼으로 촉발된 여성혐오 논란은 페미니즘을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리는 이변을 연출하며 여성혐오 문제를 공론장의 수면 위로 밀어올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개그맨 장동민씨가 ‘옹달샘’ 멤버 유상무, 유세윤씨와 함께 과거 팟캐스트에서 쏟아낸 ‘역대급’ 여성혐오 발언들이 공개되며 오랜 세월 억눌려왔던 여성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여자들은 멍청해서 남자들한테 안 돼”가 문자화 가능한 가장 순한 발언이었다.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세 멤버는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사과했지만,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들은 많은 여성들에게 무력감을 안겨주며 여전히 활발한 방송활동을 하고 있지만 ‘여혐의 아이콘’이라는 딱지는 떼지 못했다. 최근 유상무씨가 모델로 등장한 화장품 브랜드 맥의 동영상은 항의가 쇄도해 사과 공지문과 함께 유튜브에서 공식 삭제됐다.

옹달샘 이후로도 여혐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래퍼 송민호의 랩 가사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는 한국산부인과협회의 성명서까지 불렀고, 래퍼 발굴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 등장한 힙합 가사의 여성혐오도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맥심 코리아 9월호의 여성 납치살해를 연상케 하는 화보는 국제적 논란을 일으키며 전량 폐기 사태를 낳았다. 일베의 화용론을 ‘미러링’한 안티 여혐 사이트 메갈리아의 등장에 환호와 우려와 교차하면서 사회적 논란이 일기도 했다.

개그맨 장동민(왼쪽부터), 유세윤, 유상무씨가가 지난해 여성혐오 발언에 대해 해명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개그맨 장동민(왼쪽부터), 유세윤, 유상무씨가가 지난해 여성혐오 발언에 대해 해명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은 일상의 영역에까지 광범위하게 침투한 일베와 그들이 놀이문화화한 여성혐오가 극한에 달한 데 대한 반작용에서 나왔다. 여성혐오가 없었던 적은 역사상 한번도 없었지만, 드센 여자 소리 듣기 싫어 참고 있는 사이 일베의 언어라는 가공할 형태로 독버섯처럼 퍼져버린 것이다.

김금옥 한국여성연합 상임대표는 “그 어느 때보다 여성혐오가 확대되고 차별이 커지면서 수용의 한계치를 넘어선 것”이라며 “여성운동과 그로 인한 여성정책, 전담부서 운영 등 오랜 세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걸 오히려 확인하는 한 해였다”고 말했다. 페미니즘을 여전히 여성우월주의나 여성 특혜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역설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여성 교육 수준이 세계 최상위권인 국가에서 교육받으며 자기 권리의식과 목소리를 주체적으로 낼 수 있는 시각은 있는데, 세상은 너무 딴판이죠. 여성을 여전히 성적 대상화하고, 사회적 주체로, 노동자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인식과 현실의 격차가 너무 커요. SNS을 통해 차단당한 욕구를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면서 목소리들이 많이 나오게 된 거죠.”

페미니즘 도서를 베스트셀러로 만든 저자들. 왼쪽부터 리베카 솔닛,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정희진, 우에노 지즈코.
페미니즘 도서를 베스트셀러로 만든 저자들. 왼쪽부터 리베카 솔닛,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정희진, 우에노 지즈코.

뜨거운 문화콘텐츠가 된 페미니즘

현실의 억압이 불러일으킨 페미니즘을 향한 의지는 페미니즘 도서의 판매고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지난해 봄 출간돼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를 널리 유통시킨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1년 만에 1만5,000부가 판매되며, 그간 ‘아무도 안 읽는 도서 분야’에 다름 아니었던 페미니즘 부문에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올 초 발간된 아프리카계 미국 소설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는 출간 두 달 만에 7,000부가 팔리며 더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출간 2주 만에 인터넷서점 알라딘 베스트셀러 10위권에 들어간 이 책은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5주 연속 1위다. 지난달에는 사회과학 주간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우리는 모두…’(1위), ‘남자들은 자꾸…’(2위),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우에노 지즈코, 3위), ‘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 6위), ‘페미니즘의 개념들’(9위,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등 5권이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출판계로서는 ‘열 소설보다 페미니즘 하나’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알라딘의 박태근 인문사회 분야 MD는 “페미니즘 도서의 구매층을 보면 양성평등이 젊은 세대가 새롭게 요구하는 미래가치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고 분석했다. ‘남자들은 자꾸…’의 구매층은 20대가 가장 높은 38%, 30대가 32%였으며, ‘우리는 모두…’ 역시 20대가 42%, 30대가 32%였다. 2030 세대가 새로운 페미니즘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론으로 무장한 젊은 여성들은 실질적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여성단체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여성단체들 회원이 전체적으로 늘고 있는데, 특히 한국여성민우회는 후원금이 평년 대비 2배나 증가했다. 김희영 여성민우회 활동가는 “특히 젊은 여성들의 고민과 상담이 많아졌다”고 말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같은 거창한 문제는 차치하고 최소한 텔레비전에서만큼은 여성혐오를 안 보고 싶다는 호소가 많아요. 아무리 여성혐오 반대를 외쳐도 여전히 TV에선 여자는 명품백 사달라고 조르는 존재고, 이런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는 못하는 분노를 많이 토로해요.”

할리우드발 페미니즘 열풍을 일으킨 여배우들. 왼쪽부터 엠마 왓슨, 제시카 차스테인, 제니퍼 로렌스.
할리우드발 페미니즘 열풍을 일으킨 여배우들. 왼쪽부터 엠마 왓슨, 제시카 차스테인, 제니퍼 로렌스.

할리우드발 페미니즘…더디지만 바뀐다

하지만 변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방송사 예능국 PD A씨는 “요새는 프로그램 방송 중 ‘실톡’(실시간 게시판 의견)이나 SNS 반응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욕을 먹으면 다음 주 방송에 피드백을 자체 반영한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실시간 반응은 확인할 생각도 안 했고 나중에 욕을 먹더라도 무시하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몇 년 전 동료가 남자도 성 상품화를 당한다며 못생긴 남자들이 역차별과 억울함을 호소하는 콩트를 만들어 좋은 반응을 얻은 적이 있다.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는 상상도 못할 소재”라며 “여성들의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페미니즘 열풍의 진앙은 미국 할리우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지난 1년은 할리우드발 페미니즘 이슈가 뜨거웠던 한 해이기도 하다. 할리우드의 여성들이 오랜 세월 인내해온 성차별적 작업 환경-임금차별, 기회부족, 기타 부적절한 행위들-에 대한 문제제기가 특급 스타들에 의해 쉴 새 없이 나왔다. 미국 언론이 “페미니즘의 새로운 물결”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유엔 여성친선대사로 젠더 평등을 위한 ‘히 포 쉬(He for She)’ 캠페인을 시작한 엠마 왓슨, 40세 이상의 여성 시나리오 작가 기금을 만든 메릴 스트립,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소감에서 임금 평등을 외쳐 여배우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았던 패트리샤 아퀘트, 개런티 1위 여배우의 힘을 남녀 임금차별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데 사용한 제니퍼 로렌스, 블록버스터 영화 내 여성 캐릭터의 성적 대상화를 반대했던 제시카 차스테인 등이 대표적이다.

영화 ‘에밀리 블런트’에서 자신의 배역이 남성으로 바뀔 뻔한 것을 폭로하며 남성지배 서사의 문제를 제기한 한 산드라 블록, 여성 타깃 영화에 투자가 안 되는 할리우드를 비판한 셀마 헤이엑, 책으로 묶인 아디치에의 ‘TED’ 페미니즘 강연을 노래에 피처링한 비욘세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주체가 스타들이라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할리우드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은 여진이 매우 강력하다.

유명 개그맨 B씨에게 여성혐오 논란을 피하기 위해 자기검열을 하지 않는지 물었다. “일베와 메갈 모두 의식은 하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고 했다. “문제는 재미 있느냐 없느냐다. 이제 여성 외모 비하는 재미 없는 개그가 됐다. 김숙의 가모장 캐릭터는 재미가 있으니까 뜨는 것이다.” 그는 재미를 구현하는 능력에 방점을 찍어 말했지만, 그 재미에 시대와 사회에 대한 인식이 녹아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디지만 분명히 변화는 오고 있는 것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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