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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도 비약도 없는… 고전 해석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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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도 비약도 없는… 고전 해석의 정석

입력
2015.09.03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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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호연으로 170분이 지루하지 않다. 바실리 역의 오영수(오른쪽 두번째) 는 등장만으로 무대를 채우고, 윤정섭(왼쪽 두번째)은 바자로프의 양가적 면모를 담담하게 드러내며 극을 이끈다. 국립극장 제공
배우들의 호연으로 170분이 지루하지 않다. 바실리 역의 오영수(오른쪽 두번째) 는 등장만으로 무대를 채우고, 윤정섭(왼쪽 두번째)은 바자로프의 양가적 면모를 담담하게 드러내며 극을 이끈다. 국립극장 제공

자기보다 한 살 많은 아버지의 정부, 그 정부가 낳은 이복동생을 쿨하게 받아들이는 아들(아르까디)이 있다. 대학 입학 후 3년간 집을 찾지 않은 쿨한 아들(바자로프)도 있다. 이들을 이어주는 고리는 세상만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하는 니힐리즘. 제 목구멍에 들어갈 밥 한 술 벌지 못하는 주제에 머리만 굵은 두 사람의 일상은 인지부조화의 연속이다. 할아버지가 농노라 귀족계급을 경멸하는 예비 의사 바자로프는 공주의 조카이자 대토지를 소유한 과부 안나를 사랑한다. 발진티푸스가 떠도는 도시로 당차게 돌진했다 죽어버린 바자로프로 실의에 빠진 친구 아르까디는 아버지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25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초연하는 국립극단의 연극 ‘아버지와 아들’은 러시아 혁명기 두 대학생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 세대 간 엇갈린 감정과 상실감을 170분 간 펼친다.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의 동명 소설을 브라이언 프리엘(86)이 각색한 작품을 이성열 극단 백수광부 대표가 연출했다.

세상의 아들들은 아비의 계급과 취향과 호의를 부정(不定)함으로써 제 정체성을 찾는다. 마흔에 낳은 아들(바자로프)을 사랑하다 못해 “숭배하는” 아버지 바실리와 아내 아리나는 3년 만에 집에 온 아들을 위해 신부를 모셔온다. “니가 돌아온 걸 축하하는 기도를 좀 드리려고. 와준다면 기쁘겠어. 안 오겠다면… 그것도 니 마음이니까.” 예의 바르게 설교에 참석하겠다고 대답한 바자로프는 곧바로 이런 토를 달아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오늘 안이면 돼요. 내일 아침 일찍 떠날 거라서요. 9월 시험이라 공부할 게 많아요.”

세상 모든 아버지들은 그런 아들들을 통해 제 정체성을 발견한다. 바실리는 바자로프가 죽은 후 장례를 준비하며 아들의 친구 아르까디에게 고백한다. “그날 식사 때 일하던 남자애 기억나? 우리 집 하인이 아니야. 특별히 고용했지. 자네한테 좋은 인상 주려고. 아들의 배경을 조금이라도 돋보이려고. 허영 중의 허영, 모든 게 허영이로다.”

극작가 브라이언 프리엘은 아일랜드의 체호프란 별명에 걸맞게 작품 곳곳에서 체호프 대표작의 여러 장면을 오마주한다. ‘세 자매’처럼 결투는 무대 뒤에서 처리되고, ‘갈매기’처럼 바자로프의 죽음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우연하게 키스를 엿보는 장면은 ‘바냐 아저씨’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주인공 바자로프가 죽어버린 후 30분간 이어지는 결혼 파티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다. 먹고 마시는 떠들썩한 파티와 아르까디의 절규가 포개지는 장면은 흡사 ‘벚꽃동산’에서 경매 당일 벌어지는 파티를 연상시킨다.

배우들의 안정감 있는 연기, 과장도 비약도 없이 19세기 러시아 가정을 담백하게 재현한 무대는 고전 해석의 정석을 보여준다. 단, 정부 페니치카 역의 최원정은 너무 조신해 아쉽다. 니꼴라이 형제와 바자로프까지 얽히고 설킨 그녀가 조금만 색(色)을 발휘했어도 네 사람의 관계는 홍상수 영화를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1644-2003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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