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격동의 수원 근현대사가 오롯이 담긴 현장

입력
2016.06.05 22:04
0 0
부국원 지금 모습. 안창모 제공
부국원 지금 모습. 안창모 제공

수원은 지난 200여 년 사이에 극적인 변화를 겪은 도시 중 하나다. 1796년 준공된 수원 화성은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화성은 조선의 건축과 토목의 정수뿐 아니라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화성이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수원의 시작과 지금은 있지만 그 사이 200년의 시간은 잊혀졌다.

1905년 이후 수원역을 중심으로 이 도시는 바뀌기 시작했다. 역 뒤에 권업모범장이 설치되었고, 전면에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수도 방위의 화룡점정이던 화성은 일개 관광지로 바뀌고 말았다.

일제강점 하에 급성장한 도시로 부산, 군산, 청진 등이 있다. 모두 바닷가 도시라는 공통점이 있다. 일제가 농산물과 자원의 수탈 그리고 자신들의 공산품 판매를 위해 항구도시를 집중 개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도시인 수원, 개성, 전주, 진주 등은 이런 성장 대열에 함께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원에 새 역할이 부여되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합하면서 ‘조선회사령’을 만들었다. 회사 설립 때 조선총독부의 허락을 받도록 한 이 법령에는 한반도를 일본의 식량 공급과 상품시장으로 묶어두려는 식민정책의 속내가 드러났다. 이 정책으로 민족자본의 성장은 벽에 부닥쳤다. 그러나 회사령 전에 일본은 욕심의 일단을 드러냈다. 1906년의 ‘권업모범장관제’다. 이 제도는 수원 화성 건설과 함께 구축된 수리관계시설 등에 기초한 식민농업정책의 시작이었다.

일제강점기 대표적 종묘회사인 부국원과 만종원 그리고 주식회사 송도식산 중 두 곳이 수원에 있을 정도로 수원은 농정의 중심이었다. 1916년 설립된 부국원(수원시 팔달구 교동 96-1)은 이 같은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현 건물은 1923년 건축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외관 재료는 바뀌었지만 원 모습이 잘 남아있다. 부국원은 해방 후에 장소를 옮겨 종묘회사의 맥을 이어갔고, 원래 건물은 수원법원과 검찰청 그리고 교육지원청과 공화당 당사 등으로 사용됐다. 부국원 건물은 수원이 겪은 근현대사가 응축된 현장이라고 할 정도로 역사의 중심에 있는 건물이다.

해방 전 부국원 모습. 안창모 제공
해방 전 부국원 모습. 안창모 제공

2006년 구 부국원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향토문화유적이 되었지만, 보존을 위한 법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해 철거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2015년에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시민이 뽑은 ‘지켜야 할 문화유산’으로 선정되고, 수원 시민의 지원으로 수원시가 건물을 매입하기에 이르렀다.

역사를 지키려는 시민과 시의 적극 개입으로 건물은 지켜냈지만, 구 부국원의 역사적 가치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노력과 예산, 시민 지원이 필요하다. 수원이 조선의 역사만 지닌 화석 도시가 아닌 근대사의 현장이었고, 경기도의 수부로써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축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구 부국원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안창모 경기대대학원 건축설계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