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시가 말하려는 희망은 그 자체로 남기 위한 것… 단단히 간직하라

알림

시가 말하려는 희망은 그 자체로 남기 위한 것… 단단히 간직하라

입력
2015.02.11 14:57
0 0

낡은 시간이 가고 맑고 풍요로운 시간이 올 것이다

누추한 삶의 시간에 스며들어 알아볼 수도 없게 찾아올 수도…

비루먹은 말을 타고 가라 언제나처럼

그 말은 우리 열정이 들끓던 지난날의 적토마였기에,

또 다른 날의 적토마가 아닐 수 없지 않겠는가

가난한 농부 총각이 우렁각시를 만나 행복하게 사는데, 고을의 원님은 턱없이 예쁜 그의 아내를 보고 욕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농부는 말 타기 시합을 받아들여야 했다. 우렁각시는 상심한 신랑을 위로하며, 자신의 친정인 용궁에 들어가 말을 빌려 오라고 했다. 건장해 보이는 첫 번째 말, 민첩하게 보이는 두 번째 말은 모두 젖혀두고, 비루먹은 세 번째 말을 선택하라고 일렀다. 그렇게 데려온 비루먹은 말은 시합이 다 끝나도록 꾸물거리고만 있어 보는 사람의 애를 태우더니 막판에 이르러서 갑자기 이상한 힘을 발휘하여 원님의 말을 따라잡았다. 원님은 벌을 받고 농부는 원님이 되었다. 저 전설 속의 행복한 시절에는 천지신명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살아 있어서 따뜻한 감정으로 인간을 지켜보았던 것이 틀림없다. 아니 차라리 그런 행복한 시절에 없었기에 이런 전설이 만들어졌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전설을 만든 사람들은 하필이면 비루먹은 말을 생각해 내었을까?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정직한 나무꾼은 세 번째 도끼를 선택해서 나머지 두 도끼를 마저 차지했으니 운이 좋았다. 그러나 마침내 받게 될 상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우선 급한 것은 눈앞의 현실이다. 왜 착한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병든 말과 쇠도끼만을 자신의 몫으로 챙겨야 하는가?

이렇게 묻고 나면 문득 슬픈 생각이 떠오른다. 저 비루먹은 말과 쇠도끼는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문학에, 특히 시에 바쳤던 사람들의 청춘에 대한 비유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학은 모든 것을 약속하고 가장 찬란한 미래를 약속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시인들에게 주어질 완벽하고 빛나는 시간은 항상 가뭇한데, 그들에게 지금 허락된 것은 가장 초라하고 누추한 삶이다. 스스로를 적토마의 주인이라고 여긴 자에게는 비루먹은 말을 사랑해야 할 의무밖에 없었으며, 쇠도끼를 정직하게, 그러나 실은 마지못해 끌어안을 때만 금도끼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증언할 수 있었다. 시인들은 빈한할 뿐만 아니라, 그 궁핍과 자기모멸과 억압된 감정만이 문학과 시의 약속을 믿게 한다. 먹을 입이 없어야만 음식상이 나오고, 들을 귀가 없어야만 신묘한 음악이 연주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문학과 시가 헛된 것이 아니니, 약속은 아마 지켜질 것이다. 낡은 시간이 가고 맑고도 풍요로운 시간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시인들이 기대했던 모습으로 찾아올까? 혹시 그 맑고 풍요로움이 이 누추한 삶의 시간에 감쪽같이 스며들어 그들이 알아볼 수도 없는 형식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내내 낯선 손님을 기다렸는데, 그 손님은 벌써 왔다 간 것이 아닐까. 시인들은 낯선 언어의 권력을 바라며, 가장 무모한 기도가 가장 슬기로운 용기로 찬양받을 날을 기다렸는데, 시인들이 먼저 세상의 풍속에 젖어들고 날선 기운이 소진되어, 사는 것이 다 그런 것이라고 여기게끔 길이 든 나머지 제 모서리를 제가 다듬지 않을 수 없게 된 어느 날, 그래서 그 낯선 권력이 전혀 쓸모 없어지는 어느 날에야 그 시간은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경험은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말하게 한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니, 고쳐 묻는다면, 무엇을 희망으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 서정주의 ‘석류개문(石榴開門)’ 같은 시가 그 점에서 매우 깊은 진실을 말해 줄 것 같다.

공주님 한창 당년 젊었을 때는

객기로 청혼이사 나도 했네만,

너무나 청빈한 선비였던 건

그적에나 이적에나 잘 아시면서

어쩌자고 가을되어 문은 삐걱 여시나?

수두룩한 자네 딸, 잘 여문 딸

상객이나 두루 한 번 가 보라시나?

건넛말 징검다리 밖에 없는 나더러

무얼 타고 신행길을 따라 가라나?

석류가 스스로 팽창된 힘에 못 이겨 문을 여니 그 속에 예쁜 여자 가득하다. 시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옛날에 그런 여자 하나를 사모했다. 아미 높고 당찼던 여자, 아마도 부잣집 딸이었기 쉽다. 그 여자의 아름다움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것은 시인들이었기에 그 여자는 바로 시인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가난할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삶을 자신의 삶으로 선택한 시인들의 초라한 몰골 속에서 그 여자가 제 낭군을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사실 서정주 시인이 이런 이야기까지야 하려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시인이 애써 상상했던 것은 언제나 시인의 손에 놓이지 않는다. 그것은 노리개가 되고 상품이 되어 그것과는 가장 인연 없는 사람들의 몫이 된다.

그렇더라도 이제는 그 여인을 어느 골목길에서라도 만나면 자네라고 여유롭게 부를 수 없는 것은 아니겠다. 그쪽 임자도 이쪽 임자도 벌써 삶의 한 고비를 넘겼고, 젊은 날의 슬픔도 마음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반쯤 잊혀졌다. 지금은 나이 들어 딱딱한 석류가 된 그 여인이 옛날 시인에게 닫았던 대문을 스스로 저렇게 열어놓았다. 그 대문 밖으로 젊은 날의 그 여인을 닮은 그녀의 딸들이 저마다 고개를 내민다.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것은 여전히 시인이지만 그러나 그 딸들은 시인에게 너무나 늦게 찾아온 애인들일 뿐이다. 시인이 몽매에도 바라던 것들은 그 소용이 없어지는 날에나 찾아온다고 해야 할까. 이제 그가 석류알들인 젊은 딸들과 인연을 맺는다 해도 그것은 신랑으로서가 아니리라. 그에게 남은 자리가 있다면 어느 운 좋은 신랑에게 신부를 고이 데려다 주는 상객 정도가 고작이겠다. 시인은 그 자리마저 사양하려 한다. 여전히 가난하여 신행길에 타고 갈 말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은 그렇게 한다.

시인이 사양하는 이유가 단지 그뿐인 것은 물론 아니다. 시인은 자기에게 “건넛말 징검다리 밖엔” 없다고 말한다. “건넛말”도 말은 말이지만 타고 갈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물론 말장난이지만, 이 청빈한 선비에게는 그 강 건너 마을로의 산책길이 욕망의 저쪽 언덕으로 가보는 연습의 길이기도 하겠다. 그 언덕으로 가는 길은 징검다리뿐이라서 자칫 발을 헛디딜 수도 있겠다. 보석 같은 석류 알의 붉은 매혹이 혹시라도 그 진정된 마음에 혼란을 가져온다면 개울을 마저 건너기 어렵다. 시인은 저 언덕으로 고개를 돌린다. 석류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그 눈을 빈한한 삶만이 허락해 주었기에, 또 다시 고고한 수세의 태도로 그 가난을 지켜야 한다는 듯이.

또 다른 이유는 없을까. 전혀 다른 이유, 거의 정반대의 이유가 되겠지만, 이것이 진정한 이유일지 모른다. 시인이 저 석류 아가씨의 상객이 된다는 것은 새로 인연을 맺는 일이 아니라 사실 인연의 욕망을 아주 포기하는 일이다. 그것이 싫다. “한창 당년”의 혈기는 사라졌지만, 아니 사라졌기에, 그 감정이 가장 지순하게 남아 있다. 그 감정은 포기될 수 없다. 욕망에 이끌려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그 욕망의 대상 앞에서 목석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욕망을 단단히 간직하는 일이리라.

시인은 운이 없다. 그러나 운이 좋은 자는 어디 있는가? 금도끼를 가진 자는 금도끼를 알아보지 못한다. 알아보지 못하는 금도끼는 이미 금도끼가 아니다. 적토마를 지닌 자는 제 적토마를 비루먹은 말로만 여긴다. 알아보지 못하는 적토마는 적토마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시인들에게 말한다. 그 초라한 쇠도끼를 뽐냄으로써 이 세상 어디에건 찬란한 금도끼가 단단히 숨어 있게 하라고. 언제나처럼 비루먹은 말을 타고 가라고. 모든 적토마들이 지쳤을 때도 그대의 말은 느릿느릿 가던 길을 가리라고. 비루먹은 말은 우리 열정이 들끓던 지난날의 적토마였기에, 또 다른 날의 적토마가 아닐 수 없지 않겠는가.

시 쓰기는 끊임없이 희망하는 방식의 글쓰기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시가 말하려는 희망은 달성되기 위한 희망의 아니라 희망 그 자체로 남기 위한 희망이다. 희망이 거기 있으니 희망하는 대상이 또한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 희망이다. 꽃을 희망한다는 것은 꽃을 거기 피게 한 어떤 아름다운 명령에 대한 희망이며, 맑은 물을 희망한다는 것은 물을 그렇게 맑게 한 어떤 순결한 명령에 대한 희망이다. 시를 읽고 쓰는 일은 희망을 단단히 간직하는 일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