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혜영 기자

등록 : 2017.11.11 04:40

[인생 없는 교실] 교사가 만든 ‘민주시민’ 교과서로 가르치니…

등록 : 2017.11.11 04:40

#안산 시곡중 염경미 교사

‘뉴스 소비자로서 10대’ 주제 토의

“제작자 입장 비판적으로 봐야” 등

학생들 수준 높은 진단도 내놓아

경기 안산시 시곡중 염경미 교사가 2일 오후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를 활용해 뉴스 소비에 대한 수업을 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우리는 학생들이 자신의 실생활을 고민하고, 대비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고 있을까. 인생 도처에서 각종 착취, 위협, 유혹의 위기를 마주했을 때 한국 학생들은 자신의 권리와 이해관계를 잘 알고 대응할 수 있을까.

교사와 시민들은 이들 학생들을 우리 공동체의 동료 시민으로 맞이할 자세를 갖추고 있을까.

뜻있는 교사들의 이런 의문과 갈증이 빚은 교과서가 있다. 교사들의 제안과 참여로 경기도교육청이 제작해 2014년부터 활용한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다. 당시 교육청 주관 토론회에서 평교사였던 김원태 학교시민교육전국네트워크 공동대표가 “학문 중심 교육과정에만 매몰돼 있지 말고 우리 청소년을 시민으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교육을 해야 한다”고 제언한 게 발단이었다. 학교혁신, 민주시민교육 등에 대해 고민해오던 교육청이 나서서 교수가 아닌 현장 교사를 중심으로 집필진을 꾸렸고, 약 10개월에서 1년 간 치열한 구성, 집필, 여타 전문가 검토의 과정을 거쳤다.

개념 이해와 암기가 중심이던 기존 학습목표와 달리, 학생들이 한 시민으로써 사고하고 생활하는데 필요한 인권, 노동, 평등, 다양성, 평화, 연대, 환경, 민주주의, 미디어, 선거, 참여 등의 주제를 포괄했다. 주제를 이해하는 방식도 자료해석, 의견 말하기, 글쓰기, 체험하기 등의 활동을 통하도록 구성했다.

초등 2종, 중고등학교 각각 1종 등 종 4종이 개발된 교과서는 학교와 교사가 원하는 경우, 기존 사회과 교육과정의 보조교재로 활용되거나, 동아리 활동,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 혹은 선택교과로 편성해 활용하도록 배포되고 있다. 올해의 경우 경기도에서 총 40군데 초중고교가 이 교과서를 활용한 학생토론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개념을 암기하는 대신 자신의 권리와 의무, 의사표현 방법을 체험하도록 하는 활동은 아이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수원 삼일상고 허진만 교사

수업에서 근로계약서 쓰기 교육

“내가 사회적 주체란 점 가르쳐야

실생활에서 협상에 능할 수 있어”

"뉴스 소비자의 행동은 생산자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염경미 교사의 질문이 거듭되자 학생들의 발표가 이어진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학생도 권리와 책임을 지닌 소비자다”

2일 찾은 경기 안산시 시곡중 교수학습분석실에서는 중학교 ‘민주시민’ 교과서 대표저자인 염경미 교사의 토론수업이 한창이었다. 1학년 사회과 시간을 활용해 매달 한 차례 2시간짜리 학생토론교실을 연다. 올해부터 중1의 경우 정해진 진도나 시험이 없는 자유학기제가 전면 시행 중이라 가능한 편성이다. 염 교사는 2013년 연구년을 맞아 동료 교사들과 함께 약 1년간 ‘민주시민’ 교과서를 써냈다.

이날 토의주제는 ‘뉴스 소비자로서 10대는 미디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할 것인가’ 였다. 모둠 별로 오늘 게재된 각 매체의 뉴스 중 인상적인 것 5가지와 그 이유를 써내라는 과제에 곳곳에서 화제의 연예, 오락 뉴스가 쏟아졌다. 송혜교-송중기 커플의 결혼식 뒷이야기, 가수 이승기의 전역 예정 소식, 엑소 콘서트 티켓팅 전쟁, SM의 할로윈 파티 소식 등.

“아까 배운 대로, 크게 경성뉴스와 연성뉴스 중 여러분이 선택한 건 대부분 어느 쪽이었어요? 압도적으로 연성뉴스가 많네요. 이런 소식은 솔직히 재미가 있죠. 그런데 10대 뉴스소비자가 이렇게 압도적으로 연성뉴스만 좋아할 때, 여러분이 뉴스를 만들어 수익을 내야 하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어떤 뉴스를 만들려고 할까요?”

각 모둠의 활동지 분석에 이은 교사의 설명에 학생들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자 그럼, 연성 뉴스가 아닌 걸 선택한 사람들의 발표와 선정 이유도 들어볼까요?”

청소년 참정권 확대를 둘러싼 논쟁, 청년 고독사가 늘어난다는 기사 등을 택한 윤희윤군이 “대선이 있었던 5월에 진행한 토론수업에서 청소년 투표권에 대해 토론을 했던 내용이 생각나 뉴스를 선택했다”고 운을 뗐다. 앞서 대선을 앞두고 모바일 청소년 모의선거에 참여한 일, 당시 선거 연령을 낮추는 문제에 대한 사회적 토론에 대해서도 공부한 일 등이 줄줄이 아이들의 입에 올랐다.

“언뜻 재미는 없어 보이지만, 여러분의 삶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뉴스는 어느 쪽이겠어요? 어떤 뉴스가 있을까요?” 계속 토론을 유도하는 교사의 질문에 ▦학생 인권과 상벌점제 기사 ▦각종 범죄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 기사 등의 답변이 쏟아졌다. 뉴스의 소비와 생산의 관계, 삶에 끼치는 영향에 관한 토론이 거듭되자 평론가 못지 않은 수준 있는 진단도 이어졌다.

“미디어로 세상을 볼 때 만드는 사람의 입장 등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할 것 같아요.” (나시문 군)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많이 보는 뉴스와 정말 필요로 하는 뉴스가 달라서, 양쪽을 골고루 봐야 할 것 같아요” (이다은 양) “다루는 주제는 같아도 매체마다 이해하고 설명하는 관점은 다 다를 수 있는 것 같아요.” (조재문 군)

뿌듯한 염 교사가 덧붙였다. “우리는 10대 소비자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가 하는 행동과 내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결정해요. 가벼운 뉴스를 좋아하는 편식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고민해야 한다는 거죠. 즉, 올바른 소비자가 올바른 생산 기준을 만든다! 여러분이 어떤 소식이나 논쟁을 마주칠 때, ‘이게 뭐지? 내 삶과는 무슨 관련이 있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게 중요해요.”

#시민교육 성공하려면

교사ㆍ학교의 관심이 중요하고

입시 부담감도 넘어야 할 과제

“지역ㆍ시민사회와 연계도 필요”

토론수업의 주제는 성장하는 시민인 청소년, 민주주의, 선거, 자유, 평등, 노동과 경제 등을 아우른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사회의 주인’이라는 자각 심어줘야

염 교사가 교과서를 집필 할 때나 수업을 진행할 때 중점을 두는 것은 학생들의 ‘시민 역량’을 키워주는 토론 및 체험활동이다. 즉 거대해 보이는 제도와 시스템 속에서 학생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졸업 후 맞닥뜨릴 세상에서는 어디에 위치할지, 그 안에서 무엇을 요구하고 누리고 주장할 수 있는지, 어떤 역량을 길러야 여기서 헤쳐나갈 수 있는지 등을 스스로 느끼고 깨닫게 해야 한다는 취지다.

“실은 여건만 되면 세 가지가 함께 이뤄져야 해요. 수업, 지역사회와 실제로 만나는 현장 학습, 지역 시민사회와의 만남 등이죠. 그래서 올해 3~11월 시도했던 것이 ‘좌충우돌 사회참여반’이라는 동아리 활동이에요. 글로 말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익힌 교육까지 나아가야 ‘내가 이 지역의, 이 사회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자라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하거든요.”

4월에는 단원고 기억교실을 추모 방문했고, 5월에는 지역 시민단체를 방문해 해나가는 일의 방식과 철학에 대해 구체적으로 질의하고 토론했다. 6월에는 민주항쟁 유적지를 답사하기도 했다. 염 교사는 “매번 학부모 동의서를 받아 현장 학습을 했는데, 30명 정원이 금세 다 차는 것은 물론이고 늘 대기자가 줄을 섰다”고 설명했다.

“흔히 학교는 정치 무풍지대여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잖아요. ‘너는 그런 데 관심 갖지 말고 공부나 해’라면서요. 그런데 선진국일수록 아이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항, 논쟁, 이슈를 적극적으로 가르치거든요. 그래야 자기 이익과 연동된 입장을 갖출 수도 있고, 계급을 배반하는 투표를 하지 않는 시민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으니까요.”

근거 없이 부자와 기업만 추종하고, 순응하고 자기 몫에 대해 이해할 줄 모르는 아이들을 기르는 교육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염 교사는 독일에서 1976년 이뤄진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인용했다. “사회적 논쟁을 교실에서도 논쟁하게 하되 강압적인 교화나 주입식 교육은 하지 않고, 학생의 자율적 판단을 중시하면 되죠. 다양한 입장과 논쟁상황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주고, 학생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스스로 시민적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요.”

물론 그에게도 갈 길은 멀다. 보다 많은 학교에서 이 같은 수업이 이뤄지기에는 교사나 학교의 관심도, 입시 대비 수업에 대한 부담감이 너무 크다. 전문교사제도나 연수확대 등 뒷받침돼야 할 제도도 많다. “책을 만들고 저 스스로 활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수업에서 활용되도록 하는 게 목표라 우선은 모범 수업 사례를 정리해 동료교사들과 나눌 계획입니다.”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고교 교과서 대표저자인 경기 수원시 삼일상고 허진만 교사는 "학생들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생계 수단을 획득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 진 상황일 수록, 수업은 '알아두면 쓸 데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계약서 작성교육은 기본 중 기본

고교용 교과서를 활용한 수업도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1일 경기 수원시 삼일상고에서 만난 고교 ‘민주시민’ 교과서 대표저자인 이 학교 허진만 교사는 “학생들의 실생활에 절실한, 공감이 가고 재미있게 느낄만한 콘텐츠로 구성을 하려고 노력을 했다”며 “기존 교과서처럼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교육과 평가에 방점이 찍히다 보면 공교육의 변화가 더딜 수밖에 없다는 고민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수업과 업무를 마친 뒤 오후 9시부터 모여 때로는 새벽 2,3시까지 이어지는 토론과 협의, 집필, 검토 과정이 만만치는 않았지만, 그 결과 학생들이 흥미를 갖고 몰입할 만한 에피소드와 신문기사, 토론 주제 등으로 교과서가 빼곡히 채워졌다.

“논쟁적인 것은,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는 아예 가르치지 않는 것이 과거의 방식이었다면, ‘논쟁적인 것은 그대로 논쟁 그 자체로 가르치기’, ‘최대한의 정보를 주고 답은 아이들이 찾아가게 하는’ 식의 수업이라야 세상을 이해하는데 더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는 거죠.”

그렇다 보니, 누구라도 단번에 답을 하기 까다로운 토론 주제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노출 연기를 한 16세 청소년 연기자는 자신 스스로 출연을 결정할 권리가 있을까. 이를 막으려는 청소년보호위원회의 문제제기는 정당한 보호 조치일까 ▦시민단체가 특정 활동목적에 공감한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는 것은 공익성에 어긋나는 것일까 ▦아이돌 가수의 선정적 옷차림은 표현의 자유일까, 공공성 위반일까 등이다.

허 교사는 “결국 학생들을 객관식 문항으로 평가하는 현실 속에서는 전면적으로 이런 주제를 다루는 토론이나 체험 교육을 해나가기 어렵지만, 조금씩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암기 위주 교육에 균열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그래야 아이들이 스스로 언제 보호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하며, 무엇을 주장할 수 있는지를 아는 상태로 학교 밖의 세상을 마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가 인상적으로 꼽는 수업은 ‘노동과 경제’를 가르치며 진행한 ‘계약서 쓰기’다. “그 어느 수업보다도 사회시간은 세상에 나가 실제 상황을 맞이할 아이들이 ‘알아두면 쓸 데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야 하는데, 학생들은 이런 걸 배우지 못한 채 졸업하고, 어른이 돼 자취방을 구할 때가 돼서야 처음으로 계약서라는 걸 써보며 당황하죠. 그러다 보니 아르바이트를 하며 휴일수당, 야간수당을 못 받는 경우도 허다하고요.”

실제 고1 수업에서는 근로계약서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느냐를 물었을 때 26명 중 8명만 손을 들었다. 각자 4~6명씩 조를 이뤄 아르바이트생과 고용주 역할을 맡아 ‘정의로운 근로계약서’를 쓰게 하자 아이들이 이내 역할놀이에 빠져들었다. 다 쓴 계약서를 허 교사가 뜯어보고 점검하자 곳곳에서 실수도 발견됐다. “청소년은 하루 7시간 이상 일할 수 없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허 교사는 “다행히 내년 고1부터는 필수교과인 통합사회에서 ‘근로계약서 작성’에 관한 내용이라도 일부 포함되지만, 수업을 어떻게 성의껏 진행하느냐에 따라 배우는 내용에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안타깝다”고 했다.

“미국 학교에서는 입학 시 교칙(school code of conduct)을 읽고 동의할 수 있으면 서명을 하는 절차로 양자 간 권리, 의무를 자연스럽게 지도하잖아요. 권리 주체로서의 자각을 키우는 거죠. 우리 학생들은 계약서는 물론이고 안전 문제 등 실생활 세계의 각종 이슈를 대할 때 ‘내가 어떤 사회적 주체’라는 인식을 아직 못합니다. 학교에서 이걸 제대로 가르칠 때, 비로소 실생활 세계에서 협상에 능하고, 자기 견해를 적극적으로 밝힐 수 있는 시민이 될 수 있는 거겠죠.”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일보 페이스북

한국일보 트위터

한국일보닷컴 전체기사 RSS

RSS

한국일보닷컴 모바일 앱 다운받기

앱스토어구글스토어

한국일보닷컴 서비스 전체보기

Go

뉴스 NOW

이전

  • 종합
  • 정치
  • 사회
  • 경제
  • 국제
  • 문화
  • 연예
  • 라이프
  • 스포츠

다음

오늘의 사진

많이 본 뉴스

  • 1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