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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기다리던 버스가 온다

입력
2016.08.0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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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비탈길을 올라간다. 좁고 구불구불한 도로 양쪽에 주차된 자동차들 사이를 뚫고 곡예를 하듯 달린다. 이중 주차된 택배 트럭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기사가 혼잣말로 투덜거린다. 차를 이렇게 세워 놓으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마을버스처럼 산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버스는 곧 제대로 된 이차선 도로로 들어선다. 내리막길이다. 다음 정류장은 W아파트 후문입니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W아파트 후문의, 아무도 없는 버스 정류장에 그가 홀로 앉아 있다. 온 세상을 바삭바삭하게, 뜨겁게 구워버릴 것 같은 폭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느 때처럼 깃이 달린 흰색 반팔 셔츠에 베이지색 긴바지를 입은 차림이다. 바지 속에 셔츠 자락을 단정하게 집어넣은 것까지 변함이 없다. 버스가 다가오자 그는 고개를 들더니 뭐라고 혼잣말을 한다. 그는 버스에 올라탈 것인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이 동네로 이사 온 지난봄의 어느 날이었다. 그는 깔끔한 흰색 셔츠에 베이지색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타자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비어있는 내 뒷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의 둥근 얼굴과 낮은 코,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눈빛과 둔한 몸놀림을 지켜보며 이미 불안해하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안 있어, 그가 내 어깨를 툭 치면서 어눌한 말투로 “안녕하세요” 라고 말했다. 어깨를 가볍게 건드린 것에 불과했지만 나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정류장에서 버스가 멈추자 허둥지둥 내렸다. 그 뒤로 버스를 탈 때마다 나는 그를 만났다. 그러면서 같은 노선을 이용하는 다른 많은 승객들처럼 그에게 익숙해졌다. 그는 버스에 타고 있지 않으면 버스 정류장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대체로 조용한 편이지만 이따금 세상을 향해 주문을 외우듯 길게 중얼거리거나 허공과 말다툼을 하듯 고함을 지른다. 그는 늘 어리둥절한 표정이며,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가 버스에 올라탄다. 오늘은 기사 바로 뒷자리를 선택한다. 흰 머리가 듬성듬성 섞인 숱이 적은 그의 머리 바로 위에 직사각형 TV모니터가 걸려 있다. 모니터에서는 자취생 소울 푸드 탑 3가 소개되고 있다. 3위는 고추참치볶음밥, 2위는 김치볶음밥, 1위는 간장계란밥이다. 뉴스를 알려주는 자막에는 고속도로 상행선이 11시부터 정체이며, 한국남자양궁이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학교폭력 벌점 16점이 넘으면 퇴학이나 전학으로 규정이 강화되었다는 소식이 차례로 뜬다. 나는 문득 궁금하다. 그는 자취를 하는 사람일까. 늘 다림질이 잘 된 셔츠를 입고 있는 걸 보면 누군가 보살펴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는 고속버스를 타 본 적이 있을까. 리우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있다는 것은 알까. 학교 폭력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어본 경험이 있을까.

전철역에 이르자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린다. 그는 여전히 기사 뒷자리를 지키고 있다. 버스는 어느 대학 후문을 거쳐 또 다른 전철역 두 군데를 돌아서 다시 W아파트 후문에 이를 것이고, 다시 내가 사는 산동네로 올라올 것이다. 우리 동네를 지나는 오직 하나뿐인 노선인 그 초록색 버스는 내 방 창문 바로 옆 비탈길로 매일 8분마다 한 대씩 지나간다. 모습을 나타내기 전 버스의 요란한 엔진소음이 들릴 때마다 혹시 버스에 그가 타고 있지 않을까 이따금 궁금하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그가 내리거나 타는 정류장은 오직 W아파트 후문뿐이며, 그는 언제나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와 나는 거의 매일 같은 버스를 이용하지만, 순환하는 버스 노선의 절반, 내가 속한 어떤 세상은 그에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가 버스를 타고 내가 사는 동네로 올라올 확률은 내가 먼저 그에게 “안녕하세요” 라고 말을 걸 확률과 비슷할 것이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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