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메아리] 이슬람의 가면을 쓴 악마일 뿐

입력
2015.11.18 20:00
0 0

예루살렘에서 느낀 죽음의 공포

이슬람에 대한 분노 이해하지만

해법은 공동체 의식에서 찾아야

지금 당장 죽을 수 있겠다는 공포를 경험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교통사고처럼 통계적으로나 가능한 사건ㆍ사고 때문이 아니라 언제, 어느 순간 내 몸이 무기력하게 산산조각 날 지 모른다는 현실적인 두려움 말이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라면 죽음은,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관념의 영역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2003년 3월 이스라엘 예루살렘 거리에서 그런 죽음의 공포를 조금은 경험했던 것 같다. 첫 번째 토마호크 미사일이 발사되기 직전, 유엔의 최후통첩으로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철수한 직후였다. 12년도 더 지났지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갑갑해지는 것을 느낀다. 팔레스타인의 2차 인티파다(봉기)가 극에 달했던 그 때 예루살렘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자살폭탄테러가 터졌다. 많게는 수십 명의 무고한 민간인들의 팔다리가 창졸 간에 잘려나갔다. 불과 몇 시간 전 지나온 거리에서 폭탄이 터졌다는 방송을 들으면서 자살테러의 주요 목표물인 버스정류장을 지나갈 때는 정말 머리칼이 곤두섰다.

구역마다 2인1조로 중무장한 테러진압조의 살벌한 눈매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이들의 임무는 테러를 막는 게 아니라 테러범을 끝까지 추적하는 것이었으니까. 실제 살육의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음에도 죽음의 공포는 전쟁 전야 팽팽한 긴장감의 바그다드에서도, 2010년 2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카리브해 아이티의 대지진 현장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햄버거가게든, 피자집이든, 커피숍이든 언제 폭탄테러로 누구누구가 숨졌다고 적어놓은 위령패가 곳곳에 걸린 예루살렘은 이방인 눈에는 죽음의 도시였다.

파리 테러를 당한 프랑스국민이 느꼈을 공포가 이런 것이 아닐까. 예루살렘 거리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이성적 논쟁이 부질없듯이 프랑스국민이 무슬림에게 극단적 분노를 표출한다고 해서 손가락질 할 수는 없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당시 외쳤던 포용의 정신이 이번에는 왜 보이지 않느냐고 따지기에는 테러의 성격이 너무나 다르다.

바타클랑 극장에서 자살폭탄 조끼를 터뜨린 테러범의 아버지는 이슬람국가(IS) 조직원이 돼버린 아들을 되찾아오기 위해 1년 전 시리아 국경까지 넘었다고 한다. 아내의 눈물 어린 설득 편지까지 건넸지만 아들은 끝내 돌아서지 않았다. 지난주 40명 넘게 숨진 레바논 베이루트의 자살폭탄 테러 현장에서는 딸과 함께 길을 가던 30대 젊은 아버지가 군중이 몰려있는 모스크(이슬람 사원)로 향하던 테러범을 몸으로 저지하고 숨졌다.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수백 명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파리 테러범들을 기억하는 주민들은 그들이 “상냥한 청년” “평범한 아이였다”고 기억했다. 벨기에 브뤼셀의 최고 명문고교를 졸업한 촉망 받던 학생도 있었다.

뜬금없이 이런 얘기를 꺼낸 건 이런 무슬림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꾸란에 ‘살인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고 하지만, 꾸란을 읽어본 적이 없어 이슬람이 정말 과격한 종교인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시리아, 아랍에미리트연합, 쿠웨이트, 이라크, 요르단 등 중동 여러 나라를 다니며 겪어본 무슬림에게서 어떤 폭력의 냄새도 맡지 못했다는 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순박하다’는 느낌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파리 테러범들은 대부분 프랑스나 벨기에에서 태어나 그 나라 국민으로 살아온 이민 2세들이다. 중동의 지하디스트(성전주의자)들과는 출신이 다르다. 이들이 왜 악마로 돌변했는지는 익히 알려진 바다. 피부색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취업이 거부되고, 공공장소에서 전통복장 마저 입을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배척과 편견이 없었다면 이 젊은이들이 IS에 물들 가능성이 훨씬 적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테러에 대응해야 하는 지는 이미 답이 나와 있다. 감정이 용납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들을 같은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슬림을 테러와 동일시하는 편견부터 없애야 한다.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