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진
패션 칼럼니스트

등록 : 2018.02.21 04:40

[박세진의 입기, 읽기] 디자이너 사이즈가 왜 궁금한가요

등록 : 2018.02.21 04:40

8일 시작된 뉴욕 패션위크에서 모델들이 런웨이를 걷고 있다. 뉴욕패션위크를 앞두고 패션쇼장 백스테이지에는 모델을 위한 개인용 탈의 장소가 설치됐다. 뉴욕패션위크 트위터

지난 8일 시작된 뉴욕 패션위크를 앞두고 패션쇼장 백스테이지에 모델 개인용 탈의 장소를 설치하도록 합의했다는 내용이 보도됐다.할리우드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행 사건 이후 문화, 예술 각 분야에서 전개되고 있는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은 패션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델 출신인 세러 지프가 이끌고 있는 모델 협회는 지금이 실제 변화를 이뤄낼 수 있는 시기라고 판단하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미성년자 모델, 성희롱 문제, 노동 환경 개선 등에 대한 법안을 뉴욕시에 제출했고 이번에 뉴욕 패션위크를 주최하는 미국디자이너협회(CFDA)와 백스테이지 탈의실 설치도 합의하게 됐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남성 사진기자가 들락거리며 사진을 찍기도 하는 공개된 장소에서 여성 모델들이 옷을 갈아 입어야 한다는 건, 다른 직종이라면 애초에 있을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일이다. 개인용 탈의실이라고 해 봤자 백스테이지 구석에 커튼 둘러 놓은 정도로 비용도 크게 드는 일도 아니다. 그저 관행이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바뀌지 않다가 이제야 설치가 된 거다.

이런 관행이 유지된 건 아무래도 다른 분야보다 패션 산업이 몸에 대해 더 느슨한 관념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모델들은 원하지 않는 노출, 부적절한 접촉 같은 문제에 거의 방치돼 왔다. 물론 노출과 신체 접촉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건 일을 승낙한 모델이, 계약과 규정의 통제 속에서 할 일이다. ‘너도 모델이니까, 모델 일 계속 할 거라면 해야 한다’는 암묵적 강요로 이뤄질 일이 아니다.

불합리한 관행들은 한국에도 잔뜩 있다. 예를 들어 패션 디자이너를 뽑으며 키와 체중, 심지어 가슴 허리 엉덩이 사이즈까지 알릴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몇 년 전부터 불거져 온 문제다. 가장 최근 보도된 뉴스가 지난해 12월인걸 보면 이 문제는 여전히 개선이 되지 않았다.

고질적 문제가 지속되는 이유 중 막내 디자이너나 인턴 디자이너에게 디자인뿐만 아니라 피팅 모델의 역할을 요구하는 업계 관행이 있다. 피팅 모델을 따로 고용하면 비용이 든다. 디자이너와 피팅 모델이 전혀 다른 직업인데도 비용을 줄이기 위해 애초에 피팅까지 가능한 사람을 디자이너로 뽑자는 것이다. 불합리한 차별을 막기 위해 블라인드 채용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국가적으로 나오는 상황인 것을 고려하면 상식의 수준에서 상당히 벗어난 일이다.

만약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브랜드가 피팅 모델을 구할 돈을 아껴야만 하는 처지라면, 업종 운영 자체에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상황이 아닐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건 지속되는 관행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런 일들은 예컨대 백스테이지에 커튼을 설치해 뒀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이력서에서 신체 사이즈 기재를 금지하더라도 면접에서 체크한다면 역시 문제다.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해 온 일에 유난을 떤다고 말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패션업계에서 차별을 없애자고 말하는 요구들은 사실 대단한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하고, 피팅모델은 따로 섭외한다는 건 너무나 사소하고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이를 개선하는 데는 옷을 갈아입다가 난데없이 사진이 찍혀 당황스러웠다는 모델의 고백, 이게 잘못된 상황이라는 단체의 항변, 그리고 미투 운동과 같은 사회적 목소리가 필요했다. 실로 큰 사회적 낭비다.

관행이라는 이유로 악습을 내버려 두는 동안 피해는 고스란히 약자를 향한다. 무심함과 무지함을 근거로, 돈을 조금 아끼겠다고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불합리한 관행들을 본격적으로 들춰내고 끊어낼 때가 이제 됐다. 업계의 특수성이란 것도 최소한 상식적 기반 위에서 작동해야 하는 법이다.

패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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