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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은 선거 중] 위기 맞은 칠레 좌파정권

입력
2017.11.03 09:2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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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개발이 환경 논리에 막히자

재무ㆍ경제 장관 사표 던질 만큼

바첼레트 정권 경제 정책 혼돈

설상가상 원자재 시장 호황 끝나

성장률 한 차례도 2% 못 넘겨

대선 최대 이슈는 ‘정권 심판론’

보수는 피녜라 댓세론 굳어져

지방의원까지 뽑는 ‘매머드 선거’

권력지형 대격변 가능성 커져

세바스티안 피녜라 전 칠레 대통령이 7월 산티아고에서 열린 중도우파야당연합 ‘칠레 바모스’의 대선 후보 경선 투표를 마친 뒤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산티아고=AP 연합뉴스
세바스티안 피녜라 전 칠레 대통령이 7월 산티아고에서 열린 중도우파야당연합 ‘칠레 바모스’의 대선 후보 경선 투표를 마친 뒤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산티아고=AP 연합뉴스

8월 31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정부청사. 2년 동안 재무부를 이끌어 온 로드리고 발데스 장관이 돌연 자진 사퇴했다. 사임의 변은 “일부 정부 구성원과 신념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것. 경제성장을 바라는 절박함을 다른 각료들이 몰라 준다고도 했다. 그와 뜻을 같이하는 경제장관과 재무차관도 줄줄이 사표를 던졌다.

발단은 기업의 대규모 투자를 불허한 정부 결정이었다. 안데스철강이 25억달러(2조7,875억원)를 들여 칠레 북부 코킴보 지역에 철광석 수백만톤을 채굴하고 운반할 수 있는 항구를 건설하겠다는 제안서를 냈으나, 정부는 환경보호 대책이 빠져 있다는 이유로 인가를 거부했다. 그러자 경제부처 관료들은 즉각 반발하고 집단 사임했다. 칠레 집권 좌파연합의 분열상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2주 후로 다가온 대선ㆍ총선(19일)을 앞두고 칠레 좌파는 이처럼 사분오열돼 있다. 가뜩이나 계속된 경기침체로 국민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마당에 여권 내에서 후보 단일화마저 실패하면서 좌파의 영광이 ‘4년 천하’에 그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클라우디오 푸엔테스 사베드라 칠레 디에고포르탈레스대 교수는 “전체적으로 유권자들의 이념 성향을 봤을 때 진보ㆍ보수에 대한 선호도는 엇비슷하지만 좌파그룹의 정치적 분열이 너무 분명해 우파 후보에 정권을 내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예상했다.

좌파의 자멸… 대권 억만장자 품에?

칠레의 대선 제도는 다소 독특하다. 4년 임기에 중임할 수 있지만 연임은 불가능하다. 미첼 바첼레트 현 대통령도 한 번 집권(2006~2010)한 뒤 2013년 우파 후보를 누르고 재집권에 성공했다. 1차 투표에서 과반을 얻은 후보자가 나오지 않으면 내달 17일 상위 득표자 2명을 놓고 결선투표가 진행된다. 여기에 상원의원 일부(23명ㆍ임기 8년)와 하원 전체(155명ㆍ4년), 지방의회 의원(278명)들도 동시 선출하는 ‘매머드급’ 선거로 치러져 결과에 따라 권력 지형도가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다.

현재 진보 진영에선 무려 6명의 후보가 난립하고 있다. 바첼레트 대통령을 계승한 중도좌파여당연합 누에바 마요리아(새로운 다수ㆍNM)는 언론인 출신의 정치 신인 알레한드로 기지예르 상원의원을 내세웠다. 정부의 온건 노선에 반발해 진보 색채를 뚜렷이 하고 독립한 대체좌파연합(FA), 지금껏 좌파연정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았던 기독민주당(PDC)도 각각 후보를 내고 대권 도전에 나설 채비를 마친 상태이다. 이 외에도 좌파그룹으로 분류되는 군소 후보가 3명이나 더 있다.

상대적으로 보수 진영은 한결 여유롭다. 중도우파연합체 칠레 바모스(칠레여 갑시다ㆍCV)는 억만장자이자 기업가 출신인 세바스티안 피녜라 전 대통령(2010~2014)을 일찌감치 단일 후보로 확정하고 대세론을 굳힐 태세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도 정권교체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현지 여론조사기관 CEP가 지난달 25일 발표한 대선 1차 투표 선호도 조사에서 피녜라 전 대통령은 32.8%를 득표할 것으로 예측돼 기지예르 후보(13.8%)를 3배 가까이 앞섰다. FA의 베아트리스 산체스 후보는 7%의 지지율로 뒤를 이었다.

좌파의 퇴조 이유는 간명하다. 정치를 못해서다. 4년 전 대학 무상교육 실시, 법인세 인상 등 선명한 개혁 공약을 내걸고 권부에 입성한 바첼레트 정권은 출범 초부터 삐걱거렸다. 경제성장의 방향성과 속도 조절을 둘러싸고 강ㆍ온파 간 내부 이견이 불거지더니 급기야 선거개혁, 교육혁신 등 각종 정책 과제로 여파가 미쳐 임기 내내 리더십 부재에 시달렸다. 국제정치 전문 웹사이트 오픈디모크러시는 “진보적 정권에서조차 기존 정당 정치의 관행에 얽매여 의미있는 사회ㆍ제도적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더구나 올 들어 바첼레트 대통령 아들의 비리,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까지 터져 나오면서 부패의 덫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원자재 시장 호황 종료와 맞물려 경제도 속절없이 추락했다. 바첼레트 집권 기간 연평균 성장률은 한 차례도 2%를 넘지 못해 재임 당시 5%의 안정 성장을 구가했던 피녜라 전 대통령과 대비되고 있다. 올해 2월에는 국내총생산(GDP)의 2%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구리 생산 업체 에스콘디다 광산 파업으로 10억달러의 손실을 보기도 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피녜라가 인기 없는 대통령이긴 했지만 칠레 유권자들은 4년의 시간 동안 성장의 중요성을 재평가하게 됐다”고 전했다.

칠레 중도좌파여당연합의 알레한드로 기지예르 대선 후보가 당 행사에 참석해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칠레 중도좌파여당연합의 알레한드로 기지예르 대선 후보가 당 행사에 참석해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낙태 합법화 뒤집힐까

‘정권 심판론’이 모든 선거 이슈를 빨아들이는 탓에 정책 공약은 뒷전으로 밀린 지 오래다. 그나마 눈여겨 볼 쟁점은 ‘낙태 합법화’ 정도이다. 지난 8월 칠레 헌법재판소는 낙태를 부분적으로 합법화했다. 임산부의 생명이 위급하거나 성폭행에 의한 임신, 태아의 생존 가능성이 작을 경우에 한해 조건부 낙태를 허용한 것. 여성계는 1989년 낙태를 전면 금지한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유산을 극복할 길이 열렸다며 환영했으나 피녜라가 집권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는 앞서 “치료에는 구조, 낙태에는 살인이란 서로 모순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치료 목적의 낙태란 있을 수 없다”며 보수 정부가 들어설 경우 법 개정 작업에 착수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남미 진보 온라인 매체 업사이드다운월드는 “칠레에서 가톨릭교회는 개인의 권리에 강하게 입김을 미치고 낙태처럼 근본주의 의제와 관련해선 국가는 교회와 입장을 달리하지 않는다”며 피녜라 집권 시 낙태 합법화 조치가 퇴행적 변화를 겪을 것으로 내다봤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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