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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어떤 무해한 삶

입력
2018.03.18 15:2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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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비행기를 조종할 줄 몰랐고, 등산 경험도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영국에서 티베트까지 비행기로 날아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를 계획을 세웠다. 비행기가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산비탈로 날아가 동체 착륙을 시도한 뒤 거기서부터 산에 오를 작정이었다.

우선 날개를 천으로 만든 가벼운 소형 비행기를 구입해서 조종법을 배웠다. 그리고 최고봉이 해발 1000m 남짓한 웨일즈의 산악지대에서 5주 동안 나름대로 등반 훈련을 했다. 1933년 5월, 실제로 그는 소형 비행기를 몰고 영국을 떠나 카이로, 테헤란을 경유하여 인도까지 날아간다. 그러나 네팔 정부가 자국 상공을 비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인도에서 비행기를 처분했고, 셰르파족 세 명을 고용해서 500km에 이르는 티베트 고원을 걸어서 가로질렀다.

1934년 4월에 마침내 그는 에베레스트의 기슭에 이르렀고, 홀로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빙하 등반 경험이 없었으므로 여러 날 동안 길을 잃고 헤맸다. 복장도, 장비도, 식량도 터무니없이 부실했고, 희박한 산소만큼 고산병에 대한 개념도 희박했다. 그가 남긴 일기에 의하면 5월 중순 무렵, 그는 해발 6400m 지점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서 그보다 1년 전에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했던 영국 원정대가 숨겨두고 간 식량과 장비를 찾았고 그것을 무단으로 사용했다. 기력을 회복한 그가 간신히 해발 6920m 지점까지 올랐을 때, 눈앞에 수직의 거대한 빙벽이 나타난다.

거대한 수직의 빙벽이라고? 나는 잠시 책을 덮고 상상해본다. 고개를 한껏 젖혀 올려다봐도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견고한 흰 장벽을. 사람을 단숨에 무력하게 만드는 서슬푸른 얼음 절벽을. 그러나 여전히 나는 알 수 없다. 아이젠이나 피켈 같은 현대식 장비도 없이, 당시 셰르파족들이 영국 공기라고 부르던 산소통도 없이, 탈진한 상태로 추위와 싸우면서 이제 막 정상이 보이기 시작하는 지점에 다다른 사람이 맞닥뜨린 거대한 좌절이 어떤 것일지. 눈 폭풍처럼 몰아쳤을 고립감은 또 어떤 것일지.

이 무모한 등반을 시도한 이는 모리스 윌슨이라는 이름의 실존 인물이었다. 그는 인류의 불행과 고통을 금욕과 신앙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했다. 아직 아무도 그 산의 정상에 오르지 못했던 시절의 일이다. 홀로 등반을 시작한지 한 달 반쯤 지났을 무렵인 5월 28일, 그는 ‘오늘이 마지막 시도가 될 것이고 이번에는 성공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라고 일기에 썼다. 그로부터 1년 뒤 에릭 십턴이 이끄는 영국 원정대가 에베레스트 북동쪽 능선 노스 콜 부근 눈밭에서 그의 얼어붙은 시신을 발견했다.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홀로 빙하 속을 헤매다가 해발 7000m 높이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어리석고 비현실적인 자, 구제불능의 몽상가 혹은 이상주의자, 망상에 가까운 근본주의적 신앙에 빠진 광신도? 어쨌거나 그는 세상에 널리 유익하지 않았으나 해롭지도 않았다. 무해했을 뿐 아니라 흔히 우리가 ‘어리석음’이나 ‘광기’로 부르는 어떤 욕망이 안온한 일상을 유지하고 성공적으로 사회에 적응하고자 하는 현실적 욕망보다 더 대단한 결단력과 의지, 인내심을 발휘할 수도 있음을 증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만약 그가 누군가에게 해로웠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였을 것이다.

안전한 이불 속에 웅크린 채 다만 책을 뒤적이면서 이불 밖 세상을 몽상이나 망상처럼 감지하고 있는 나는 모리스 윌슨이 마주친 구체적 현실이었을 수직의 빙벽을 떠올리며 이상하고도 슬픈 느낌에 잠긴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널리 유익하지는 않으나 무해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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