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싸움, 작은 행동들이 우리를 지킨다"

알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싸움, 작은 행동들이 우리를 지킨다"

입력
2015.03.15 16:13
0 0

할매들 연대가 이 시대에 화두 제시

결국 송전탑 섰지만 투쟁은 진행 중, 반대시위 주민 등 60명에 벌금형

옆에 있어 주고 지켜봐 주고, 바늘구멍 같은 희망 찾는데 큰 힘

12일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린 '밀양을 살다' 북콘서트에서 밀양 주민과 책 저자들이 "송전탑은 세워졌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북콘서트 2부에서 세월호 참사 유족, 쌍용차 해고 노동자, 용산사태 희생자 유족 등과 시대의 상처를 공유했다.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12일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린 '밀양을 살다' 북콘서트에서 밀양 주민과 책 저자들이 "송전탑은 세워졌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북콘서트 2부에서 세월호 참사 유족, 쌍용차 해고 노동자, 용산사태 희생자 유족 등과 시대의 상처를 공유했다.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할매 10명 잡겠다고 2,000명, 3,000명을 보내. 어떻게 이럴 수가…. 이렇게 사람을 아프게 하면 안 돼.”

기세 좋게 성토하던 목소리가 울먹임으로 잦아 들었다. 경남 밀양 부북면 평밭마을에 사는 이사라(84) 할머니는 지난해 4월 출간된 ‘밀양을 살다’(오월의봄)에 담긴 열 일곱 개의 목소리 중 한 명이다.

‘밀양을 살다’는 경남 밀양의 초고압 송전탑 공사를 막기 위해 인권운동가, 르포작가, 학생, 전직기자 등이 밀양으로 내려가 주민들의 육성을 담아온 책이다. 나이 아흔을 바라보는 할매부터 오십 대의 ‘젊은’ 부부까지 밀양 주민 17명의 목소리가 담겼다. 언론이 투사 혹은 피해자로만 그려온 밀양 사람들의 모습을 평범한 우리 이웃의 얼굴로 복원하는 데 성공한 이 책은 제55회 한국출판문화상 편집부문에 선정됐다.

“의식화 주체는 외부세력이 아니라 할매들”

12일 오후 7시30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체칠리아홀에서 열린 ‘밀양을 살다’ 북콘서트에는 밀양 주민들과 책의 저자들 외에 쌍용차 사태,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용산사태,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와 유족들이 참석했다. ‘함께 살자 2015’라는 제목 아래 짓밟히고 억눌린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고통을 나누고 연대의 필요성을 재확인했다.

콘서트 1부는 인권연구소 창의 연구활동가인 김영옥씨의 사회로 밀양 주민과 저자들 간의 대화가 이뤄졌다. 밀양 상동면 여수마을에서 올라온 김영자씨는 부녀회장 경력 11년차인 여장부답게 “후회 없이 싸웠다”는 말로 지난해의 투쟁을 회고했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송전탑을 마주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송전탑 122번에서 123번을 잇는 다리를 핸드폰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내 삶의 터전이 이렇게 변한 것을, 저 괴물 같은 송전탑이 어디를 가나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상황을 가끔 사진으로 찍어 봅니다. 하지만 송전탑이 섰다고 우리가 진 게 아닙니다. 이 북콘서트처럼 지금도 전국을 다니며 싸움을 계속할 수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에서 나온 김정우 신부는 “할매들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는 너스레로 분위기를 띄웠다. “저는 2011년 일본 후쿠시마 대지진 때도 핵의 위험을 몰랐던 사람입니다. 할매들 싸움에 끼어들면서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한전의 한 고위관리가 밀양 투쟁을 놓고 ‘외부 세력에 의해 의식화됐다’는 말을 하던데, 실상 의식화의 주체는 할매들입니다. 환경도 핵도 일체 관심 없던 저에게 할매들이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제대로 연대하는 게 뭔지 가르쳐주셨습니다.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밀양 할매들은 이 시대에 화두를 던진 분들입니다.”

사회자 김영옥씨는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밀양과 함께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송전탑 공사는 완료됐지만 현지 주민들이 넘어야 할 산은 첩첩이다. 최근 법원은 송전탑 반대시위에 참가했던 밀양 주민과 연대활동가들 중 기소된 60여명에게 잇달아 벌금형을 선고했다. 판결 추세로 보면 최종 벌금은 2억원이 넘을 예정이다.

김영자씨는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했다. “저번에 영화(밀양 아리랑) 찍을 때 카메라가 계속 따라다니길래 ‘좀 치아라’고 했는데 그게 있으니까 참 좋데예? 경찰들 행동이 달라지데예. (지난해) 6월 11일 행정대집행 때도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주지 않았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릅니다. 이런 작은 행동들이 밀양을 지킵니다.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알아주십시오. 우리를 지켜봐 주십시오.”

“같이 웃고 울어준 시민들이 힘”

북콘서트의 진풍경은 밀양부터 세월호까지 사회적으로 파장이 컸던 사건의 주인공들이 한 자리에 모인 2부 순서였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설립 반대 운동에 투신한 문정현 신부, 쌍용차 부당 해고자들을 위해 싸우는 김정우 전 쌍용차 노조 지부장, 용산사태 때 시아버지를 잃고 남편의 구속을 겪은 정영신씨, 세월호 참사 때 단원고 고등학생인 아들을 잃은 임영애씨, 그리고 밀양 주민 구미현씨와 인권운동가 미류씨가 자리를 함께 했다. 모인 이들의 가슴엔 약속이나 한 듯 노란 리본이 달려 있었다. 임씨는 대담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가슴이 벅찬 듯 울먹였다.

대화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밀양을 살다’에 등장하는 ‘울력’이었다. 울력은 촌락사회에서 쓰던 말로, 길흉사가 있거나 일손이 모자라는 집에 마을 사람들이 무보수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협동 관행이다. 미류씨는 밀양 행정대집행 때 경찰의 통제를 뚫고 송전탑까지 올라간 유일한 이들이 쌍용차 노동자였음을 상기시키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이 더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김정우 전 지부장은 “울력의 힘”이라고 답했다.

“대한문에서 천막을 치고 철거당하기까지, 외로움에 떨던 해고자들에게 가장 큰 힘이 돼준 건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같이 울고 웃어준 시민들입니다. 한 젊은 어머니는 어린 아이를 안고 와서 모금함에 돈을 넣으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싸워줘서 고맙다’고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어떤 어르신은 ‘당신들을 이렇게 거리에 쫓겨나도록 방치해서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바늘구멍 같은 희망을 찾는 동안 힘이 돼 준 시민들이 없었으면 쌍용차의 투쟁도 없었을 겁니다.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 이게 사람 사는 세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거라고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밀양이 강정이고 용산, 세월호였다”

세월호 유족 임씨는 지난 1년을 “쓰나미 같았다”고 말했다. 미류씨는 임씨를 가장 최근의 일을 겪었다는 의미에서 “막내”라고 불렀다. 아직 상처는 채 아물지 않아 임씨의 토로는 눈물로 여러 차례 끊겼다. “광화문에만 가도 종북이라 하고 빨갱이라 하고…, 그것도 다 참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자꾸 내 새끼를 욕하는데, 자식 팔아 시체 장사한다고…. 남편한테 집회에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집에서 애 사진이나 보려고 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밀양 간담회에 갔는데 거기 할매들이 ‘끝까지 싸우면 나중에 후회는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자식은 못 지켰지만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이제 남의 일이라고 눈 돌리지 않을 겁니다. 정말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산사태 유족 정씨는 “우리 모두 같은 세상을 원하는 것 같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정씨는 참사 이후 사회활동가로 변신해 전국 투쟁 현장을 누비고 있다. “2009년에 시아버지를 잃고 남편까지 감옥에 보내고 나니 ‘내 무지가 나를 만들었구나, 내가 세상을 외면하고 산 죄인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방 하나 메고 밀양이든 강정이든 무작정 찾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게 내가 사는 이유라는 걸 절감했거든요. 지금 우리가 모인 것도 밀양이 강정이고, 밀양이 세월호고, 밀양이 용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빨리 잊습니다. 벌써 세월호 유족들의 호소가, 밀양 어르신들의 말이 지겹다고 해요. 남에게 해 안 끼치면 잘 사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건 결국 가진 자들입니다. 당장 내게 닥친 일 아니라고 외면하는 사람들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마음과 마음이 모이고 손과 손이 잡히면 우리가 원하는 세상 빨리 앞당길 수 있습니다.”

2시간으로 예정된 북 콘서트는 대담자와 청중이 한데 어울려 울고 웃으며 10시가 가까워서야 끝이 났다. 1부와 2부 중간에는 포크 가수 사이의 공연도 이어졌다.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는 벌금 모금 운동을 이어가는 한편, 5월 밀양 주민들의 ‘탈핵 탈송전탑 기행 보고서’를 발간하고 전국 순회 북 콘서트를 열 예정이다. 6월에는 행정대집행 1주년을 맞아 ‘밀양 송전탑 백서’도 발간한다.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릴레이 북 콘서트는 4월 9일까지 매주 목요일 열린다. 다음 순서는 19일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번역 부문 수상작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놓고 전중환 경희대 교수와 번역자 김명남씨가 진화심리학으로 풀어본 폭력의 역사를 살펴본다. 참가 신청은 인터넷 서점 알라딘 홈페이지에서 하면 된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