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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칼럼]노무현의 미국, 문재인의 미국

입력
2017.06.2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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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라던 盧, 한미동맹관계 한 차원 높여

‘미국보다 북한 먼저’ 프레임 씌워진 文

대미 실용주의 바탕 한미관계 새 장 열길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서울 용산 한미연합사를 방문해 작전지휘통제실에서 'WE GO TOGETHER' '우리 같이 갑시다'를 선창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임호영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 문 대통령,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한민구 국방부 장관. 연합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서울 용산 한미연합사를 방문해 작전지휘통제실에서 'WE GO TOGETHER' '우리 같이 갑시다'를 선창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임호영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 문 대통령,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한민구 국방부 장관. 연합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시절인 2002년 9월 “반미 좀 하면 어때”라는 발언을 했다가 두고두고 반미주의자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당시 영남대 강연에서 한 발언의 맥락을 보면 무리한 뒤집어씌우기였다. 그는 그때까지 미국에 가본 적이 없었다. 청중 한 사람이 이를 거론하며 “왜 미국에 가지 않느냐, 반미주의자 아니냐”고 물었다. 노 후보는 바빠서 못 갔다면서 “미국 한 번 못 갔다고 반미주의자냐. 또 반미 좀 하면 어떠냐”라고 답했다. 유머스런 답변이어서 좌중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노 후보는 웃음이 잦아들자 “대통령 하겠다는 사람이 반미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국정에 큰 어려움을 줄 거다”라고 말을 이어 갔다. 보수 진영은 이런 대목은 쏙 빼고 노 전 대통령 임기 내내 “반미 좀 하면 어때” 발언을 앞세워 그의 반미성향을 문제삼았다.

그의 재임 중 ‘자주ㆍ균형 외교’를 추구하면서 자주파-동맹파 갈등이 빚어지고 대북접근 방식을 놓고 미국과 적잖은 불협화음을 노출했다. 보수진영은 한미동맹이 흔들린다고 줄기차게 비판했다. 하지만 그 이전 어떤 정부 때보다도 한미관계에서 이룬 성과가 컸다. 한미 FTA 타결, 한국군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기지 평택이전, 작전통제권 한국군 이양 등 매우 까다로운 협상과 결정이 그 시절 이뤄졌다. 조지 W 부시 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으로 일했던 마이클 그린은 “전보다 한미동맹이 더 공고해졌고, 결실도 많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노무현에 덧씌워진 반미 프레임의 허망함을 말해 준다.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시절 “미국보다 북한에 먼저 가겠다”고 한 말로 큰 논란에 휩싸였다. 동맹인 미국보다 핵과 미사일개발에 매달리는 북한을 우선시하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고 해서다. 문 대통령은 대선 전 펴낸 <대한민국이 묻는다>라는 책에서 “미국이냐 북한이냐, 선택하라는 질문은 참 슬픈 질문이면서 동시에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했다. 한반도 평화 구축과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북한 아닌 지옥이라도 가야 할 판인데 대통령이 되면 미국 먼저 가야 한다는 ‘제한된 사고’가 슬프고,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사상검증처럼 된다는 게 슬프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취임 50일 만인 29일 미국을 방문하게 돼 북한 먼저 가겠다는 말은 실현 불가능하게 됐다. 하지만 “미국보다 북한 먼저”는 노무현의 “반미 좀 하면 어때”처럼 발언 맥락은 생략한 채 두고두고 문 대통령에 ‘북한 우선주의’ 프레임으로 작동할 것이다. 외교안보라인이 대북 대화파 일색이라는 볼멘소리와 자주파로 분류되는 문정인 외교안보특보의 최근 방미 발언에 대한 비난이 벌써 이런 프레임을 깔고 있다.

유력 대선후보가 으레 대선 전 미국을 방문해 일종의 ‘신고식’을 갖는 것과는 달리 문 대통령도 노무현처럼 미국과 이렇다 할 인연을 쌓지 못했다. 그래도 뉴욕에서 유학한 아들 졸업식에 다녀온 적이 있다니 대통령이 되기까지 한 번도 미국땅을 밟아보지 않은 노무현보다는 나은 셈이다. 그런 문 대통령이 이번 방미 중 미국과의 특별한 인연을 부각시키는 이벤트를 갖는다. 6ㆍ25 전쟁 중 흥남 철수 때 피란민을 태우고 남하한 미군 함정 빅토리아호의 당시 선원을 만나는 행사다.

그 배에는 문 대통령 부모가 타고 있었고, 흥남 철수 3년 후 문 대통령이 거제에서 태어났다. 그 미군 함정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문 대통령도 없었을 터이다. 2003년 5월 처음 미국을 방문한 노 전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 후 “53년 전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으면 저는 지금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미국의 참전과 한미동맹에 대한 나름의 감사의 말이었다. 문 대통령의 이번 이벤트는 그보다 훨씬 더 극적으로 미국인들에게 비칠 법하다.

문 대통령이 상대해야 할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은 노무현이 상대했던 조지 W 부시의 미국보다 훨씬 거칠고 여건도 한층 더 어려워졌다. 노무현으로부터 자주적이면서 실용주의적 면모를 이어받은 문재인은 또 어떤 한미관계사를 써 나갈지 궁금하다.

이계성 논설실장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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