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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공순이가 된 대학생… 혁명의 시대를 달군 고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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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공순이가 된 대학생… 혁명의 시대를 달군 고민들

입력
2015.05.2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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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노동운동 첫 입체 연구서

한국사회 구조적 변혁 필요성 제기

'학출'과 노동운동사 살펴보고

구술 생애사로 현재의 모습 전해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1 · 유경순 지음 · 봄날의박씨 발행ㆍ720쪽ㆍ2만 3,000원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1 · 유경순 지음 · 봄날의박씨 발행ㆍ720쪽ㆍ2만 3,000원

1980년대의 일이다. 뼈 빠지게 가르쳐서 대학에 보냈더니 잘난 자식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공돌이 공순이가 되었다. 학교를 떠나서 공장으로 들어간 그 시절 학생운동 출신 노동자를 ‘학출’이라고 부른다.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이 와야 한다며 부모의 기대를 배반하고 노동 현장으로 뛰어든 그 숫자가 몇인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1만명은 넘을 거라고 추정할 뿐이다. 언론은 그들을 ‘위장취업자’라고 했다. 현장에서는 ‘학삐리’ ‘먹물’로 통했다. 정권은 ‘불순세력’ ‘좌경용공’이라고 불렀다. 그 시절 기업에는 ‘위장취업자’ 색출 지침이 돌았다. “이력서의 필체가 기재된 학력에 비해 좋거나, 안경을 쓰고 학생들이 잘 입는 복장을 한 근로자, 대학가의 속어를 쓰는 경우, 글씨 쓰는 손마디에 굳은살이 박혀 있는 경우, 노동법 등에 지식이 많은 자, 이유 없이 동료들에게 선심과 친절을 베푸는 경우(한국일보 1985년 10월 3일자).”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은 학출이 주도한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의 역사를 처음으로 정리하고 분석한 노작이다. 저자 유경순은 1985년 구로공단 동맹파업을 다룬 ‘아름다운 연대’, 여성 노동자들 이야기인 ‘나, 여성 노동자’, ‘전노협 1990~1995’ 등을 쓴 연구자로 현재 노동자교육센터 부소장을 맡고 있다. “1980년대 학출활동가에 대해, 변혁운동에 대해, 말을 걸기 위한 시도”로 이 책을 썼다.

한국현대사에서 1980년대는 ‘혁명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사회를 바꾸려는 열망이 폭발했다. 이 시기의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1960~70년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양상을 띠는데, 그 중심에 학출 운동가들이 있었다. 학출은 1970년대 선배들이 ‘개별적으로’, 다분히 ‘나로드니키적’ 감성으로 노동현장에 뛰어든 것과 달리 ‘집단적 조직적으로’ 투신했고 노동자 스스로 정치적 주체로 서도록 주도했다. 당시 학출의 변혁적 노동운동을 저자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운동 세력이 대중운동과 상호작용하면서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추구하는 운동”으로 규정한다.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으로 촉발된 민주노조운동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일부였던 것과 달리,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은 그 지향과 주체 면에서 민주화운동과 대립ㆍ갈등ㆍ연대하면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변혁의 필요성을 제기함으로써 민주주의의 내용을 심화시켰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한 여성 노동자들이 공장 창턱에 앉아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학출 활동가들이 참여한 이 파업은 이후 노동운동의 정치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5년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한 여성 노동자들이 공장 창턱에 앉아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학출 활동가들이 참여한 이 파업은 이후 노동운동의 정치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년대 학출과 변혁적 노동운동에 관한 최초의 입체적 연구서인 이 책은 당시 학출들의 구술과 방대한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씌어졌다. 수기, 기록문, 소식지, 팸플릿, 재판기록물, 연감과 백서, 신문ㆍ잡지 등 관련 기록을 샅샅이 수집해 시대를 읽고, 그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한 학출의 구술로 당사자들의 육성을 기록했다. 전체 2권 중 제1권은 1980년대 학출과 노동운동사이고, 제2권은 학출 활동가들의 구술 생애사다. 구술을 받은 53명 중 12명의 육성을 따로 정리함으로써 공식적 기록만 봐서는 놓치기 쉬운 개인의 삶을 촘촘하게 복원했다. 시대의 격랑 속에 노동운동에 투신한 20대 청년시절 그들의 고민과 열망을 30년이 흐른 현재의 모습과 함께 전한다.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2 · 유경순 지음 · 봄날의박씨 발행ㆍ544쪽ㆍ2만 3,000원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2 · 유경순 지음 · 봄날의박씨 발행ㆍ544쪽ㆍ2만 3,000원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의 정점은 1985년 6월 22일부터 7월 23일까지 한 달 넘게 구로공단을 뒤흔들었던 구로동맹파업이다. 대우어패럴 노조 간부 구속에 항의해 5개 사업장 6개 공장에서 약 1,400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을 벌였고, 5개 사업장에서 지지연대투쟁을 벌여 총 2,500여명의 노동자가 투쟁에 참여했다. 노동운동단체 주도로 가두시위가 벌어졌고, 서울과 전라도, 경상도에서 지지농성과 성명서가 이어졌다. 해방 후 첫 동맹파업이자 정권에 맞선 정치 투쟁이었던 이 사건은 47명이 구속되고 1,400여명의 노동자가 해고당하는 패배로 끝났지만, 이후 노동운동이 정치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경험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1996ㆍ97년 노동법개정 총파업 투쟁을 거치면서 정치조직화를 추동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후 민주노동당이 탄생했고 절차적 민주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노동운동 쪽은 좌파정치조직으로 재편됐다.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사를 다룬 제 1권에서 저자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주체와 방법론을 놓고 벌어진 노선 투쟁의 흐름과 양상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NLPDR(NL?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 NDR(민족민주주의혁명), PD(민중민주주의), CA(제헌의회 그룹) 등 각 정치조직의 형성과 분화 과정의 계보를 정리했다. 이제는 이름조차 낯설어 가끔 언론 등에서 마주치면 암호처럼 들리는 이 용어들은, ‘먹물’ 학출들이 한때 구가한 관념 투쟁의 화석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뜨겁고 치열했던 고민의 증거다.

30년이 지난 현재, 저자가 만난 그 시절 학출은 대부분 생업에 종사하고 일부는 운동 현장에 남아 있다. 철공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가난하게 자란 1980년대 학출 박정순은 노동 현장 경험이 자신의 오늘에 미친 영향을 이렇게 말한다. “내 나이 스물두 살에 그렸던 민중이 주인인 세상, 사람 사는 세상, 통일된 조국은 언제쯤이면 실현될까 생각하면, 반사적으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반문하기도 해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하며 기쁘게 살려고 애쓰고 있는 거 같아요.”

“청년실업이 50만을 넘은 지 오래이고 ‘삼포세대’를 넘어 ‘오포세대’라 불릴 정도로 경제적 불안, 사회적 존립의 불안 속에 지극히 개별화한” 지금 여기의 청년세대에게, 1980년대 학출의 삶은 비현실적인 전설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대상황과 개인의 삶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기에” 저자가 제 2권 서문에서 던진 다음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2010년대 시대상황과 (청년) 개인의 삶은 어떠한가, 아니 어떠해야 하는가.”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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