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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교야구인가…봉황대기에 답이 있다

입력
2014.08.17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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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예선 없는 유일 전국대회

방학 중에 열려 학습권도 보장

제42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개막이 열흘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고교야구 주말리그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사진은 지난해 9월15일 제41회 대회 결승전(군산상고-마산고)에서 군산상고의 열띤 응원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제42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개막이 열흘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고교야구 주말리그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사진은 지난해 9월15일 제41회 대회 결승전(군산상고-마산고)에서 군산상고의 열띤 응원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일보는 제42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개막을 앞두고 ‘고교야구 기(氣) 살리기’를 3회에 걸쳐 시리즈로 게재한다. ‘공부하는 운동선수 육성’이라는 취지로 도입된 주말리그 4년의 현황과 실태를 짚어보고 해외 사례 비교를 통해 침체된 고교야구 부흥의 당위성과 나아갈 방향을 점검해본다.

한국의 ‘고시엔(甲子園)’이라 불리는 봉황대기 전국 고교야구대회는 1971년 창설해 2010년까지 40년간 국내 유일의 지역예선 없는 통합 토너먼트 대회로 아마추어 야구인들의 인기와 사랑을 독차지했다.

현재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인야구선수의 ‘선수 출신’ 신분을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에 등록한 사실 여부로 결정할 만큼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대회 중 마지막으로 열렸던 봉황대기는 모든 고교팀이 제한 없이 출전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각종 이변이 속출하는 명승부가 연출되며 ‘전국구 스타’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다른 대회에서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무명 선수들에겐 선망의 무대였다. 방학을 이용해 재일동포 선수들까지 출전해 한민족의 자긍심을 심어 주기도 했다. 명실공히 프로야구 출범 이전까지 한국 야구를 상징하는 축제의 장이었다.

그러나 2011년 ‘공부하는 학생 선수를 육성한다’는 정부 시책에 따라 주말리그제가 도입되면서 희생양이 됐다. 전국 대회를 축소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무등기, 대붕기, 화랑대기, 미추홀기 등 지방 대회를 없앴고, 방학 중에 열려 학습권 보장이라는 정부 방침과도 맞아 떨어졌던 봉황대기마저 오히려 폐지시켜 일선 고교와 학부모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봉황대기 폐지로 학생 선수들의 진학, 취업 문이 좁아졌고, 동문들의 후원 관계, 아마추어 야구에 대한 지원도 열악해지는 등 부작용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일선 학교와 학부모들의 염원으로 지난해 3년 만에 부활의 결실을 맺었다.

1971년 제1회 대회에서는 무명의 김재박(전 LG 감독)이 활약한 대광고가 당대 고교 최고 스타 윤몽룡(작고)이 이끄는 강호 중앙고를 누르고 결승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으나 초록 봉황은 경북고에 돌아갔다. 당시 경북고 에이스 남우식은 54이닝을 완투하면서 2실점만 허용하는 괴력을 뽐냈다. ‘국보 투수’ 선동열(KIA 감독)의 이름이 처음 알려진 것도 사실상 봉황대기였다. 1980년 10회 대회에서 광주일고의 선동열은 노히트노런을 기록했고, 대구상고 이종두(삼성 코치)는 고교야구 사상 첫 사이클링히트의 대기록을 작성했다. 휘문고 박정혁은 1989년 19회 대회에서 공주고 1학년이던 박찬호(은퇴)를 상대로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한 뒤 다음날 진흥고와의 첫 타석에서도 홈런을 때려 고교야구 사상 첫 4연타석 홈런 진기록을 수립했다. 봉황대기 최다 우승팀은 충남의 천안북일고로 총 5차례 정상에 올랐다.

성환희기자 hhs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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