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임소형 기자

등록 : 2016.09.26 04:00

[뒤끝뉴스] 국민이 과학을 불신하는 이유

등록 : 2016.09.26 04:00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의 경주 지진이 발생한지 2주일째다. 지진이나 태풍처럼 일반적인 경험이나 상식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재난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과학에 기댄다.

정확하고 속 시원한 설명을 해줄 거라는 기대와 함께. 그러나 경주 지진을 겪으면서 이러한 기대는 무너졌다. 과학은 상황을 진정시키기는커녕 되레 혼란을 부추겼다.

지진의 원인이 되는 활성단층을 연구한 보고서가 2009년 이미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본보 19일자 1면) 혼란은 점화됐다. 활성단층 연구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해온 재난 당국과 과학계는 잊고 있던 보고서의 재등장에 당황했다. 이후 보고서는 곳곳에 퍼졌다. 급기야 22일 일부 언론이 보고서를 인용해 원자력발전소 근처에서 규모 8.3의 강진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하 지질연)은 부랴부랴 “자료가 워낙 부족한 탓에 가상의 값을 입력해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해 본 결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지진 규모가 산출됐다”고 해명했다.

보고서 요약문 중 ‘주요 연구성과’를 기술한 부분에는 ‘추가령단층, 왕숙천단층, 광주단층, 전주단층, 정읍단층, 의당단층, 공주단층, 십자가단층 등이 활성단층임을 규명’했다고 씌어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보고서의 책임을 맡았던 과학자는 이날 한 지진 심포지엄에서 연사로 나서 이들 단층이 “활성단층일 ‘가능성’이 있으니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고한 것일 뿐”이라는 골자로 발표한 뒤 황급히 자리를 떴다. 일부 기자들이 쫓아갔으나 지질연 관계자들에게 막혔다. 과학 주무 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가 이 과학자에게 인터뷰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는 후문이다. 또 이튿날 지질연은 갑작스레 브리핑을 열었다. 임원들까지 참석해 지금까지의 해명 내용을 다시 강조했다. 질의응답 시간은 10분으로 제한했다. 이런 브리핑 자리를 도대체 왜 만든 것이냐고 묻자 지질연 관계자는 “미래부가 하라고 했다”고 실토했다.

이 보고서만으로 활성단층을 단정지을 수 없는 건 사실이다. 보고서는 활성단층을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 중 한 가지만 활용했기 때문이다. 비용이나 시간이 모자랐을 것이다. 지질연의 한 임원은 “지질 자료도 너무 부족했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보고서는 가치가 있다. 공공연구의 중심인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특정 지역이 아닌 한반도 전체를 염두에 두고 활성단층 연구에 착수한 첫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활성단층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지적한 점도 앞으로 학계가 염두에 둬야 하는 대목이다.

결국 실망스러운 건 보고서 내용이 아니다. 이를 둘러싼 과학자와 연구기관, 정부의 대응 방식이다. 과학자는 연구의 가치를 소신 있게 설명하지 못했고, 연구기관은 소관 부처에 끌려 다녔으며, 부처는 일을 키우지 않으려는 데만 급급했다. 이 같은 상황을 지켜본 한 지질학자가 뼈 있는 말을 남겼다. 그는 “경주 지진에 대한 관심이 잦아든 뒤 다시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받아야 할 상황이 되면 그때도 지질연이 이렇게 소극적으로 대응할지 의문”이라며 “아마 그 땐 연구의 가치를 다르게 설명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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