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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작가의 발칙한 유머… 신성함을 와해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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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작가의 발칙한 유머… 신성함을 와해시키다

입력
2015.08.2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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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모독' 암살 위협 시달리던 살만 루슈디가 쓴 유일한 단편집

동양과 서양 모두 끌어안는 이야기, "나는 선택을 거부한다" 마지막 절규

인도 태생의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 ‘이스트, 웨스트’는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방황하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녹아 들어간 단편소설집이다. 문학동네 제공 ⓒ Timothy Greenfield-Sanders
인도 태생의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 ‘이스트, 웨스트’는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방황하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녹아 들어간 단편소설집이다. 문학동네 제공 ⓒ Timothy Greenfield-Sanders

살만 루슈디가 쓴 단편소설이라니, 상상하기 쉽지 않다.

루슈디는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한 1947년 봄베이(현 뭄바이)에서 태어났다. 동서양이 뒤섞인 고향의 풍경은 루슈디 작품의 영원한 주제가 됐고, 그는 동양과 서양 사이에 찍힌 “쉼표” 같은 존재로 스스로를 규정했다. 1981년에 발표한 ‘한밤의 아이들’은 인도의 장구한 역사가 허리 끊기듯 끊어지고 현대국가로 체질 변경을 시도하면서 겪은 진통을 그린 소설로, 시간으로는 인도의 고대 왕조부터 현대까지, 공간으로는 동양과 서양을 모조리 끌어 안는다. 세계를 유리구슬 안에 담아 굴리고 노는 작가의 단편엔 과연 어떤 이야기가 담길까.

‘이스트, 웨스트’ 살만 루슈디 지음·김송현정 옮김 문학동네 발행·244쪽·1만2,000원
‘이스트, 웨스트’ 살만 루슈디 지음·김송현정 옮김 문학동네 발행·244쪽·1만2,000원

새로 출간된 ‘이스트, 웨스트’는 1994년 영국에서 처음 나온, 작가의 유일한 단편집이다. 1981년부터 13년 간 쓴 단편 아홉 편이 묶였다. 1994년은 이슬람 모독 논란으로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작가가 한창 도피 생활을 하던 때다. 그럼에도 책은 루슈디 특유의 지독한 유머로 가득하다.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되 그 인과를 왜곡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그는 단편에서도 그 역량을 십분 발휘, 각종 신성한 것들을 뒤틀고 희롱한다.

‘예언자의 머리카락’은 한 고리대금업자가 예언자 무함마드의 머리카락을 손에 넣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다정한 남편이자 개방적인 아버지를 자처하던 남자는 머리카락이 집에 들어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로 돌변, 새벽부터 가족들을 끌어내 기도를 시키고 딸에게 부르카를 뒤집어 씌운다. 공포에 떨던 자녀들이 도둑을 시켜 머리카락을 훔쳐내게 하지만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온 가족이 몰살 당하는 참극으로 이어진다. 도둑이 가져온 머리카락은 절름발이인 그의 네 아들을 모두 정상인으로 만들어 놓지만, 구걸을 할 수 없게 된 아들들이 파산하는 결말에선 쓴웃음을 감출 수가 없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 관계를 맺다(산타페, 서기 1492년)’는 콜럼버스가 탐험에 소요될 비용을 후원 받기 위해 이사벨 여왕을 꼬시는 발칙한 내용이다. 콜럼버스는 여왕의 발이라도 핥을 각오가 돼 있지만 이미 419명의 ‘기쁨조’를 보유한 여왕에게 그는 투명인간일 뿐이다. 좌절한 콜럼버스가 광야로 떠난 사이 여왕은 자신이 정복한 민족들의 피로 가득 찬 그릇 안에 해충이 득실대는 꿈을 꾼다. “알려진 세상을 소유하는 것”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여왕은 콜럼버스를 불러들여 후원을 약속한다. 유럽에서 개척자로 숭앙 받는 콜럼버스가 양아치로 변신, 여왕에게 '껄떡'대는 모습에서 작가의 우아한 블랙 코미디는 절정을 이룬다. 콜럼버스의 원래 목적이 미 대륙이 아닌 인도라는 것은, 물론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마지막에 실린 ‘코터’는 인도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가족들의 이야기 속에 영어에 서툰 늙은 유모와 뇌졸중으로 말이 어눌한 경비의 소박한 사랑을 녹여냈다. 루슈디 소설로는 드물게 따뜻하고 선악구분이 명확한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경험을 담은 자전소설이다. 비틀즈를 닮은 불량배들로부터 봉변을 당한 유모는 결국 고향 봄베이의 품에 안겨 안정을 찾지만, 이민자인 주인공은 안길 수 있는 땅이 없다. 그의 마지막 절규에선 동양과 서양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작가의 외침이 겹쳐 들린다. “동과 서, 그 팽팽한 끈들이 명령한다. 선택하라, 선택하라. (…) 나는 어떠한 밧줄도 선택하지 않는다. 올가미, 올무, 그 중 어떠한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듣고 있는가? 나는 선택하기를 거부한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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