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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진실을 담는가… 해학과 풍자에 담은 언어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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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진실을 담는가… 해학과 풍자에 담은 언어의 허상

입력
2015.05.22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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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지음

문학과지성사 발행ㆍ292쪽ㆍ1만2,000원

“세상은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에서 겨우 한 페이지만을 읽을 뿐이다.”

어느 술집 벽면에서 소설가 이장욱씨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이 글귀를 보았다고 한다. 다행히도 그는 동의하지 않았는데 “여행하지 않는 사람의 ‘한 페이지’에 온 세상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곤 답가와 같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세상은 책이다. 소설이란 그 책의 어떤 페이지, 어떤 문장에 그은 밑줄일 뿐이다.”

이장욱 작가의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은 ‘고백의 제왕’ 이후 5년 만에 펴낸 소설집이다. 2010~2014년 쓴 여덟 편의 단편을 묶었다. 그가 밑줄 그은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알아둬야 할 건 작가가 단단한 땅보다는, 손에 잡히지 않는 공기나 밤새 내린 빗방울에 밑줄 긋기를 즐긴다는 사실이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는 진실만을 말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반 친구의 지갑을 훔친 혐의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뺨을 얻어 맞은 ‘나’는 지갑을 훔치지 않았다고 말할수록 지갑을 훔친 아이가 되는 묘한 경험을 한다. 언어가 진실을 실어나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뒤엔 통상 말을 불신하는 절차를 밟게 되지만 ‘나’의 대응은 좀 달랐다. 그 길로 파출소를 찾아 담임선생님이 자기 짝을 더듬는 걸 “보지 못했다”고 말한 것. 언어는 진실을 전달하지 못하며 오히려 진실 바깥을 비출 뿐, 이라는 깨달음을 주인공은 이렇게 실천에 옮긴다.

성인이 되어 박물관에서 일하게 된 ‘나’는 목조 비로자나불이 올라탄 기린에 완전히 압도되고, 10년 넘게 기린불을 보살피는 데 생을 바친다. 그러던 중 기린불이 위작 논란에 휘말리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그 귀빈들을 안내하고, 기린불의 자리를 세심하게 청소하고, 실내온도를 신중하게 조절하고, 매일 그것의 안위를 확인해온 사람은 뭐가 된다는 말입니까?”

‘진짜’를 규정하는 건 10년의 세월인가, 탄소 측정인가. 늘 언어 바깥에만 머무는 진실을 붙들기 위해 그는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우리 모두의 정귀보’는 가짜 평전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띤다. 1972년 담양에서 출생, 저 유명한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21세기, 내일은 어디서 오는가?’ 전시에 아시아인으로는 유일하게 초청됐으나 이후 자살로 추정되는 실종사건에 휘말리며 전설로 남은 천재 화가 정귀보는 물론 허구의 인물이다.

평전 작가의 시선을 따라 포착한 정귀보의 삶은 책은커녕 종이 한쪽도 못 채울 만큼 단조롭다. 그는 학창시절 사생대회에 나간 적도, 예술가 특유의 비사회성으로 탈영을 하거나 직장 상사와 마찰을 일으킨 적도 없다. 오히려 정귀보를 예술가로 만드는 건 그 주변의 ‘예술가’들로, 매년 신춘문예에 소설을 투고하는 고등학교 담임은 생활기록부에 “성격 활달하지만 말이 없는 편” 같은 알쏭달쏭한 글을 남긴다. 서양화과 교수들은 전날 회식자리에서 “기본기보다는 가능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던 기억 때문에 정귀보의 그림을 합격시키고, 지원작이 유난히 적었던 한 공모전에서는 “가장 인간적인 인간의 얼굴”이라는 묘한 이유로 그의 그림을 선정한다. 정귀보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주변부의 예술혼은 더욱 타올라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화가, 죽은 채로 미래가 된 화가, 무상의 터치가 창조하는 급진적인 전위성으로 인간을 재해석한 화가” 같은 수식어들이 쏟아진다.

이장욱 소설로는 드물게 해학적인 이 소설은 평단, 그리고 어느 정도는 작가 자신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삶의 조작에 언어가 기여하는 바는 얼마나 큰가. 진실과 허구, 언어가 유발하는 삶의 역설을 관조하던 작가는 결국 뱉어낸 말을 수정하기에 이른다. “세상은, 책이 아니다. 삶과 사랑 역시 그러하다.”

아이러니한 건 작가가 언어의 허상을 고발하는 동안 독자는 그 특유의 미문에 밑줄을 긋게 된다는 것.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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