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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원근법] 졸업하는 제자 K에게

입력
2016.02.25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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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K가 박사학위를 받는다. 2007년 3월 K가 대학원에 입학해 연구실로 찾아와 첫 면담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학부에서 철학을 공부한 K는 시민사회와 정보사회를 공부해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속으론 관심이 컸지만 겉으론 덤덤하게 연관된 주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교수와 제자의 만남은 젊은이들의 ‘밀당’과 비슷하다. 밀당을 통해 연인으로 발전하고 결혼에 이르듯, 선생과 제자도 조금씩 속내를 내보이며 학문과 인간 관계를 쌓아간다. 9년 동안 일상을 함께 했던 제자인 만큼 K의 졸업은 남다르고 애틋하다.

어떤 학문이든 박사학위란 자기 분야에서 독자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할 역량을 갖췄다는 일종의 승인 절차다. 학부를 졸업한 다음 유학을 가거나 국내에서 공부해 대개 서른 전후에 박사학위를 받지만, 고생의 문은 그때부터 열린다. 최근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송창용 박사 팀이 발표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8월과 2015년 2월 신규 박사(9,259명) 중 취업한 이들은 76.4%였고, 그 가운데 임금 근로자의 39.8%는 비정규직이었다. 이 비정규직 중 박사후 과정은 39.9%, 전업 시간강사는 36.3%였다.

주목할 것은 전공에 따라 고용 조건의 차이가 크다는 점이다. 신규 박사의 45.1%가 직장에서 받는 연봉이 5,000만원 이상이라고 답했지만, 인문 계열의 60.3%, 자연 계열의 41.3%, 예술 및 체육 계열의 52.4%는 연봉 3,000만원 미만을 받는다고 응답했다. 일련의 통계들은 현재 우리 사회 신규 박사들이 처한 현실을 생생히 보여준다.

과거의 경우 시간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 업적을 쌓다 보면 교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그래도 적지 않게 주어졌다. 하지만 이런 기회의 문은 서서히 좁아져 왔다. 특히 인문·사회 계열의 경우 대학의 구조조정에 따라 그 문이 아예 닫히는 학과나 분야도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진행될 대학 신입생의 감소에 대응해 더욱 강화될 대학의 구조조정은 학문 후속세대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때 학문 연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이지 ‘보따리 장사’를 전전하는 생존의 불안을 안고서 지속적인 학문 연구가 축적되길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동안 시간강사의 삶의 질에 대한 제도적 준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교육부가 마련한 시간강사법은 시간강사에게 교원의 지위를 부여하고 임용 계약을 1년 이상으로 하는 등 입법 취지는 좋았다. 그러나 여러 조항들이 덧붙여지면서 대다수 시간강사와 교육단체가 반대하는 저임금 비정규교수직 양산법이 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논란 끝에 지난해 연말 이 법의 시행은 2년 뒤로 다시 한 번 미뤄졌다.

시간강사의 처우 개선과 신분 보장은 우리 학문의 발전을 위한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한창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신규 박사들에게 자유로운 연구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은 국가 미래를 위한 생산적인 투자다. 문제의 핵심이 대학 재정에 있음을 나 역시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강사의 삶의 질을 더 이상 이대로 놓아둘 수는 없다. 정부는 대학 관계자 및 단체들과 논의해 국가와 사학의 재정 부담을 늘리는 방식으로라도 과감한 보완책을 강구해야 한다.

지식기반사회의 진전에서 대학은 새로운 과제를 안고 있다. 지식 경쟁력 제고라는 시대적 요구와 진리 추구의 거점이라는 본연의 역할은 오늘날 대학에게 부여된 이중 과제다. 대학이 지식과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의 자유로운 공동체인 한, 이 공동체의 미래 중심축을 이룰 신규 박사들이 경제적 구속에서 벗어나 마음 놓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를 해줘야 한다. 지식정보사회의 만개 속에서 그 젊은 주역들이 정작 소외되는 아이러니를 지켜보는 마음 안타깝기 그지없다.

다음 주 월요일에는 K가 박사학위를 수여 받는 졸업식이 열린다. 스스로 좁은 문을 선택한 K의 용기를 가상히 여기면서도, 그가 밟고 가야 할 가시밭길이 자꾸 눈에 밟힌다. 시간강사의 삶과 학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길 소망한다.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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