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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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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환대

입력
2015.12.17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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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김현경 박사가 자신의 책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지성사, 2015)에서 묘사한 바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에서 모욕은 굴욕의 모습을 띠고 노동자 앞에 나타난다(이 책에서 모욕은 언제나 가해자가 있으나 굴욕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별된다). 예고 없이 실직을 당할 때, 일한 대가가 터무니없이 적을 때 사람들은 굴욕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은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노동자를 해고한 사장조차도 시장의 법칙에 따라 행동했을 뿐 그를 모욕하려던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의 설명에 의하면 그가 경험하는 모욕감은 단지 자존감이 결여된 탓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 즉 권리가 필요하다. 신권철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말마따나 세상은 권리 없는 인간을 물건처럼 취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면서도 구조적 차원에서는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뺏는다. 여기에서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시작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시장은 일체의 규범적 구속을 벗어난 절대적 가치로 규정되곤 한다. 경쟁에서 탈락한 채 불안정 노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마치 오래 전부터 시장에 있던 자연스러운(법이 관여해서는 안 되는) 존재처럼 취급된다. 이들은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 채 자신의 낮은 고용 가능성을 탓하며 노동시장의 냉혹함을 버텨야 한다.

그러나 일할 능력과 의지가 있고 생애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일하는데도 가난한 계층, 즉 근로빈곤층은 고용과 사회안전망이 정합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드러내는 징표일 뿐이다. 즉 근로 빈곤의 원인은 근로자의 능력과 일자리의 부족이 아니라 고용의 불안정성과 저임금, 일자리와 사회보장 간 연계의 단절에서 찾아야 한다. 근로빈곤층에 대한 정책 역시 좋은 일자리의 창출과 위 원인을 줄이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조치는 그들이 노동으로 획득한 권리를 보호하여 이들을 사회 구성원으로서 ‘환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노사관계의 현실은 이와 어긋나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10일자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법정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비율은 2001년 4.4%에서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2013년 11.4%, 2014년엔 12.1%에 이른다. 그럼에도 고용노동부의 근로 감독에 의한 적발 건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2012년 1,892건, 2013년 1,200여 건, 2014년 832건에 불과하다. 이러한 모순된 상황은 근로빈곤층의 권리 보호를 위한 정부의 노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걸 드러내는 증거다.

2015년 최저 시급은 5,580원. 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2015년 최저 시급은 5,580원. 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최저임금법 등과 같은 노동법의 규범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자율적 이행을 확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지만, 이것은 위반 행위의 적발 가능성이 높고 그에 대한 제재가 기업에게 심각한 비용으로 느껴질 때만 가능한 것이다. 즉 정부의 소극적인 근로감독은 근로빈곤층의 상황을 악화시키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노동법의 규범력을 침식시키는 원인이다.

노동시장 개혁 논의로 떠들썩한 요즈음, 근로빈곤층의 일자리를 더 불안정하게 만들겠다는 얘기만 들려온다. 정부와 여당은 노동시장이 여전히 경직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근로빈곤층이 경험하는 시장은 충분히 유연하고 냉혹하며 모욕적이다. 이들의 기본적 권리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고민은 부족하고 실천은 눈에 띠지 않는다.

정부는 자신의 선의를 믿어 달라고 하지만, 노동법의 이행을 담보하기 위한 방안 특히 근로감독 기능을 정상화하고 근로감독관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 없이는 현재 정부와 여당이 내세우는 노동시장에 관한 여러 표어가 구두선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듯하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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