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표향 기자

등록 : 2018.01.23 04:40
수정 : 2018.01.23 09:11

‘B급 며느리’ 가부장제에 하이킥을 날리다

‘B급 며느리’ 선호빈 감독ㆍ주인공 김진영씨 인터뷰

등록 : 2018.01.23 04:40
수정 : 2018.01.23 09:11

#1

감독이 아내 고부갈등 4년 촬영

영화 ‘B급 며느리’ 조용한 인기

시어머니 ‘변덕’ 채증 위해 시작

영화 제작지원 받으며 일 커져

#2

아내 “남편은 고래 사이 새우 아냐

싸우든가 중재해야지 회피 안돼”

다큐멘터리 영화 ‘B급 며느리’를 연출한 선호빈 감독(왼쪽)과 주인공인 아내 김진영씨, 그리고 여섯 살 아들 해준(가운데)군이 지난 18일 한국일보를 찾아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다. 류효진 기자

김진영(36)씨는 ‘B급 며느리’다. 영어로 ‘My Son’s Crazy Wife(내 아들의 정신 나간 아내)’라고도 불린다. ‘시월드’에서 기죽지 않고 똑 부러지게 할 말을 해서 얻은 영광 어린 수식이다. 진영씨는 며느리에게 유독 가혹한 폐습에 맞선다. “결혼 전에 이름 부르며 편하게 지내던 시동생을 왜 갑자기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해요? 도련님은 하인이 윗사람을 부르는 말이잖아요. 싫어요.” “시어머니와 한바탕 하고 명절에 안 내려갔어요. 그래서 완벽한 명절을 보냈죠.” 말 안 듣는 며느리 때문에 시어머니 조경숙씨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걔가 B급이나 돼? F급이야, F급!”

아내와 어머니 사이의 갈등이 폭발할 때마다 선호빈(37) 감독은 주섬주섬 카메라를 꺼냈다. 그렇게 4년간 카메라를 들고 ‘욕받이’ 노릇을 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B급 며느리’를 만들었다. 선 감독이 자신을 갈아 넣었다는 의미에서 에밀레종의 인신공양 전설에 빗대 ‘에밀레 프로젝트’ 혹은 ‘독립영화판 사랑과 전쟁’이라 불렀던 이 영화는 17일 개봉 이후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최근 한국일보를 찾은 선 감독과 진영씨에게 기혼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전하니 기뻐하기는커녕 살짝 울적해했다. “고작 신경질 부린 것밖에 없는데 저를 보고 통쾌해하다니요. 이것조차도 못하고 살아온 분들이 얼마나 많다는 건가요.”(진영씨) “사실 영화를 볼 때마다 우울해요. 자꾸 지난 기억이 떠올라서.”(선 감독)

‘B급 며느리’에 담긴 김진영씨와 선호빈 감독. 에스와이코마드 제공

며느리는 왜 참아야 하나요?

촬영의 시작과 목적은 ‘채증’이었다. 진영씨가 시어머니의 말 바꾸기를 증거로 남겨달라고 남편인 선 감독에게 요구했다. 우연히 영상을 본 선 감독의 영화계 동료들이 박장대소했다. 그때 영화로 만들어볼 결심을 했다. “소박하게 시작했는데 제작지원을 받으면서 일이 커졌어요. 상황이 진짜 심각했는데 영화에는 30%만 담았어요. 제가 너무 힘드니까 영화는 풍자적으로 재미있게 만들고 싶었죠.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잖아요. 진짜 맞는 말 같아요.”

고부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결혼 2년째인 2012년 아들(손자) 해준이가 태어나면서부터다. 손자를 끔직하게 아낀 시부모가 매주 아들 부부 집을 찾아 왔고, 충돌이 잦아졌다. “손자만 보면 된다”는 시어머니에게 진영씨는 “내가 싫으면 내 아들도 볼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제가 아이 낳아주러 온 사람인가요.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엄마에 대한 존중과 배려 없이, ‘너는 빠져라’ ‘아이만 보겠다’고 하니 분통이 터지더라고요. 좀 치사하더라도 아들을 구실 삼아 제 이야기를 관철시켜야 했어요.”

요리 솜씨가 부족하다고 타박 받고 시부모에게 말대꾸했다고 혼나는 걸 진영씨는 참지 않았다. “남자들과 똑같이 공부하느라 바빴는데 왜 여자만 살림 못한다고 혼나야 해요?” 결국 2013년 여름부터 2년 넘게 시댁에 발길을 끊었다. 진영씨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고부갈등 자체보다 고부갈등으로 인해 스스로 꾸려가는 삶이 망가졌다는 억울함이었다. “연애가 하늘에 떠 있는 것이라면, 결혼은 낙하산을 타고 땅으로 내려오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저만의 방식으로 천천히 내려오고 싶었어요. 그런데 고부갈등이 낙하산 줄을 끊어버려서 추락한 거예요. 원망스러웠어요.”

선 감독은 자신을 향한 가족들의 차가운 시선에 당혹감을 느꼈다. “남자라서 평생 사랑만 받았어요. 여자가 겪는 설움을 몰랐어요. 여자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저 자신을 반성했습니다.”

손자 해준군을 너무나 예뻐하는 시어머니 조경숙씨. 에스와이코마드 제공

촬영을 시작할 때 아기였던 해준(가운데)군은 내년에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여섯 살 어린이가 됐다. 선호빈 감독과 김진영씨도 고부갈등으로 힘겨웠던 시간을 이겨내고 한층 단단해졌다. 류효진기자

가부장제에 하이킥을 날려라

고부 사이를 떠나면 진영씨와 시어머니 경숙씨는 평소 아무 문제가 없다. 진영씨는 대학 입학하자마자 사법고시 1차에 합격한 재원이다. 명랑하고 밝은 성격이라 남편과 아이를 늘 웃게 한다. 경숙씨도 구연동화 자원봉사를 다니는 인자한 할머니다. 영화에서 선 감독은 ‘가족제도’가 빚어낸 고부갈등이 개인 차원의 문제로 잘못 환원되는 것을 지적한다. 진영씨가 남편(아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도 그래서다. “남편은 고래 싸움에 낀 새우가 아니에요. 고부갈등의 당사자예요. 제대로 싸우든가, 아니면 중재를 해야죠. 아내에게 ‘너만 참으면 아무 문제 없다’고 회피하면 안 돼요. 자기 어머니를 불쌍하게 여기면서 그런 식으로 아내를 대하면 아내까지 어머니 같은 신세로 만드는 거예요.”

가부장제 아래에서는 며느리, 시어머니, 아들, 남편이라는 역할만 남고 개인은 지워져 버린다. 가부장제가 확장된 형태인 사회도 마찬가지다. 진영씨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부장제의 피해자”라고 했다. “가부장제는 역할과 기능만 강조해요. 그 역할을 잘 못하면 ‘뭘 배웠냐’ ‘F급이다’라는 평가를 받는 거죠. 시아버지도, 장남도, 차남도, 양적 차이가 있지만 가부장제에 눌려 산 피해자예요. 서로를 개인으로 존중한다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처 주는 일은 덜하지 않을까요.”

진영씨와 시어머니는 요즘 큰 갈등 없이 잘 지낸다. 영화에도 진영씨가 스스로 시댁을 찾아가는 모습이 담겼다. 올 겨울엔 김장도 같이 했다. 선 감독은 “서로에게 절대 넘으면 안 되는 선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라며 “새로운 차원에서 시즌2가 시작된 셈”이라고 말했다. “심리상담을 받았더니 ‘평범한 고부갈등’이라고 하더군요. 남들도 불행하다는 말이 왜 그리 위안이 되던지. 이 영화가 관객에게 그런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어요. 내 아내 김진영씨를 존경합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B급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말 바꾸기를 영상으로 남겨 달라는 아내 김진영씨의 요구에서 시작됐다. 진영씨는 “정작 진실 공방 때는 증거 영상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오히려 남편에게 역공을 당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영화를 편집하면서 아픈 기억이 떠올라 우울했다”는 선호빈 감독은 “영상을 거듭 돌려 보면서 아내의 논리에서 허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며 웃음을 보탰다. 류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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