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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획]경제 위기 뚫은 아산의 해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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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획]경제 위기 뚫은 아산의 해법들

입력
2015.11.0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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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25일이면 범 현대가 창업주인 아산(峨山)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된다. 1915년 11월25일 태어나 2001년 3월21일 86세로 눈을 감은 그는 1970년대 현대그룹이 무섭게 성장하며 정경유착의 대표적 기업인처럼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자동차 중공업 건설 등 우리 경제의 등뼈가 된 산업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한국경제의 거인’‘불도저’로 불라는 정 전 명예회장은 생전에 숱한 시련과 도전의 세월을 보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남에게 물려받아 운영하던 쌀가게는 2년 만에 일본 총독부의 배급제 시행으로 문을 닫았고 자동차정비사업소는 화마에 휩싸였다. 1954년 시작한 고령교 보수공사로 전 재산을 잃은 그는 60세가 돼서야 빚을 청산했다.

쉽지 않은 나이에 포기할 법 한데 그는 주저 앉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그의 이 같은 도전과 위기 타개책은 세계적 경제 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재계에 길잡이가 되고 있다.

현대자동차 제네시스의 중동 선적 모습. 1967년 설립해 7년 만에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를 탄생시킨 현대차는 이제 세계 5위 자동차 업체로 급성장했다. 현대차 제공
현대자동차 제네시스의 중동 선적 모습. 1967년 설립해 7년 만에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를 탄생시킨 현대차는 이제 세계 5위 자동차 업체로 급성장했다. 현대차 제공

답은 현장에 있다

정 전 명예회장은 오늘날 재계의 공식처럼 된 현장경영의 대표적 기업인이다. 재벌 오너라고 뒷전에 있지 않고 틈만 나면 공사 현장과 생산시설을 찾아 현장 노동자들과 호흡하며 문제점을 파악해 바로 잡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대전-대구 구간. 옥천군과 영동군을 연결하는 당제터널(현 옥천터널) 공사는 절암토사로 된 퇴적층이 파기만 하면 무너져 사람이 죽기까지 했다.

이를 지켜 본 정 전 명예회장은 더 이상 현대건설 만으로는 무리라고 생각하고 계열사인 단양시멘트(현 현대시멘트)에 일반 시멘트 생산을 중지하고 빨리 굳는 조강 시멘트 생산을 지시했다. 여기에 작업조를 2개에서 6개로 늘리고 모든 중장비를 동원했다.

흙을 파내자 마자 시멘트로 벽을 치는 작업을 밤낮 없이 한 결과 6개월이 걸린다는 공사를 25일 만에 마쳤다. 현장 사정에 정통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주영 전 현대 명예회장은 천수만에서 거센 물살로 물막이 공사가 불가능하자 고철선을 가라앉혀 해결했다. 현대차그룹 제공
정주영 전 현대 명예회장은 천수만에서 거센 물살로 물막이 공사가 불가능하자 고철선을 가라앉혀 해결했다. 현대차그룹 제공

유조선 공법이 탄생한 천수만 공사도 현장에서 답을 찾은 대표적 사례다. 정 전 명예회장은 물살이 거세 집채만한 바위를 쏟아 부어도 흔적조차 없던 천수만을 둘러 보고 고철 유조선을 가라앉히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현장을 누비던 그는 1973년 11월 새벽 울산조선소 건설현장을 돌아보다가 차량이 뒤집혀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으나 현장 경영을 중단하지 않았다.

손해 봐도 신용이 자본

해외에서 현대 신화의 바탕이 된 건설공사는 정 전 명예회장의 ‘신용이 곧 자본’이라는 경영철학이 토대가 됐다. 1954년 4월 시작한 고령교(대구-거창) 복구공사는 건설 장비가 거의 없어 인력에 의존했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가 치솟으며 인건비와 자재 값이 폭등했다. 공사를 시작할 때 40환이던 쌀 한 가마 값이 4,000환으로 100배나 뛰었다.

정 전 명예회장은 엄청난 물가고에 친척들 집까지 팔아 공사를 마쳤지만 적자를 보고 말았다. 비록 경제적으로 손해를 봤지만 대신 현대에 맡기면 믿을 수 있다는 신용이라는 큰 자산을 확보해 정부 공사를 대거 맡으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됐다.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65년 국내 기업의 첫 해외진출인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했지만 기술과 경험 부족으로 난관에 부딪쳤다. 폭우와 나쁜 토질 탓에 공사가 계속 중단되며 비용이 치솟아 그만두자는 건의가 빗발쳤지만 정 전 명예회장은 “이완용이 될 수 없다”며 “계약대로 마쳐야 한다”고 독려했다. 결국 재정상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이때 쌓은 신용으로 베트남 캄란만 준설, 알래스카 협곡 교량, 파푸아뉴기니의 지하수력발전소, 호주 항만 공사 등을 줄줄이 수주해 국제 건설업체로 급성장했다.

1974년 6월 현대조선소 준공과 동시에 유조선 2척을 건조한 세계 조선사에 유일무이한 기록도 정 전 명예회장의 신용에 대한 고집이 낳은 신화였다. 2년 3개월간 방파제를 쌓아 조선소를 지으며 조선소 밖에서 쇠를 깎고 붙여 배를 만들었다.

1983년 정주영 전 현대 명예회장이 건조 중인 선박의 프로펠러 위에 올라가 직원과 대화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제공
1983년 정주영 전 현대 명예회장이 건조 중인 선박의 프로펠러 위에 올라가 직원과 대화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제공

사회적 책임에 인색하지 말라

‘엄동설한에도, 열사의 중동에서도 힘든 공사에 최선을 다했던 근로자들의 땀과 정성이 없었다면 현대건설의 눈부신 성장도 없었을 것이다.’

정 전 명예회장은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의 한 대목이다. 그래서 그는 현대건설의 이익을 노동자와 사회로 돌리기 위해 1977년 7월 갖고 있던 현대건설 주식 절반을 내놓아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하고, 매년 배당금 50억원을 사회복지사업에 쓰도록 했다. 고 이우주 전 연세대 총장은 생전에 “아산재단은 벽지 병원사업의 꾸준한 추진과 사회복지단체 재정 지원, 대학 연구 및 장학사업 후원 등으로 사회적 공감을 얻었다”고 평했다.

특히 정 전 명예회장은 기업 활동으로 국가에 보답해야 한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을 철저하게 따랐다. 국가의 어려움에 동참하고 책임을 나눈다는 생각도 여기서 비롯됐다. 그의 이 같은 생각은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 한 글자당 가로ㆍ세로 2m가 넘는 푯말이 돼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될 수 있는 길이다.’

허정헌기자 xscop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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