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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증세를 증세라 부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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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증세를 증세라 부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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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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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내놓은 공격적인 복지 공약은 야당을 무색하게 했다. 무상급식 논쟁에서 보편복지 주도권을 잡았던 야당을 밀어내고 폭넓은 층에서 표심을 얻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 때부터 ‘증세 없는 복지’가 자가당착이라고 지적했다. 노인에 주는 기초연금을 확대하고, 중증질환자에 대해 의료비 간병비 병실료 부담을 줄이겠다는 등의 공약은 우리나라의 복지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것이었지만 이에 수반할 재원확보 방안이 구체화되지 않았던 때문이다.

이런 예상은 올해 연말정산으로 낸 세금을 다시 환급해 주기로 결론이 난 연말정산 파동과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 백지화 사건에서 고스란히 현실화했다. 정말 앞뒤가 안 맞는 것은 줄줄이 뒤집어진 이 정책들이 명분도 있고, 국민을 설득할 여지도 충분히 있었다는 점이다. 당정이 반대층을 설득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접은 것은, 증세를 증세로 인정할 수 없어서였다.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바꾼 올해의 연말정산 제도는 세금을 더 많이 내는 고소득층이 더 많은 세금을 환급받을 수 있었던 기존의 제도를 고친 것이다. 세 부담의 형평성을 높이면서 9,000억원 정도의 세수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었다. 명목상 세율을 높인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증세인 셈이다. 그러나 부담이 커지는 층이 고소득층뿐만 아니라 다자녀를 둔 가정이나 부양가족 없는 미혼 세대주까지 번지는 바람에 여당은 국민적 반발을 견디지 못하고 소급적용이라는 최악의 수를 뒀다. 결과적으로 강하게 반대하면 소급해서 되돌려준다는 나쁜 선례를 남겼고, 늘어난 세수 중 3,000억원 정도가 다시 줄어들게 됐다.

재산(지역가입자)과 소득(직장가입자)으로 이원화된 건보료 부과체계를 소득 중심으로 일원화하려던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을 백지화한 일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건보료 부과 기준을 소득 중심으로 바꾸면 월 수백만원씩 연금이나 임대료를 받으면서도 직장 다니는 자녀의 피부양자로 등록돼 건보료를 한 푼도 안 내던 고소득자들이 건보료를 더 낸다. 반대로 생활고로 목숨을 끊은 ‘송파 세 모녀’처럼 일정한 소득이 없어도 단칸방이 있다는 이유로 5만원의 건보료를 내던 저소득 지역가입자의 부담은 줄어든다. 새로 건보료를 물릴 기준을 연간 종합과세소득 2,000만원으로 삼을 경우 부담이 줄어들 이들은 약 600만명으로 이들로부터 총 2조원을 덜 걷고, 부담이 커지는 이들은 약 45만명으로 7,000억원 가량을 더 걷게 된다. 형평성 원칙에도 맞는 일인데다가 표심을 계산하더라도 개편안을 지지할 이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이다. 그런데도 건보료 부담이 늘어날 일부 고소득자들의 반발을 의식해 명분과 원칙을 내던졌고, 개편 백지화에 대해 반발할 지역가입자들을 달래기 위한 대책만 내놓겠다고 말해 건보재정만 악화하게 생겼다.

증세 없이 복지혜택만 넓히는 것은 불가능한 약속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다수 국민들이 알고 있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가 추진해 온 담뱃값 인상, 연말정산 개선은 세율을 높이지 않았을 뿐, 세수를 확보하기 위한 사실상의 증세다. 그런데도 지난해 담뱃값 인상 논의가 불거졌을 때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증세가 아니다”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식의 주장을 했고, 최근 연말정산 파동이 일었을 때도 “증세 논의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부정했다.

복지 확대를 위해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증세문제를 공론화할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세율을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면세대상을 줄이는 것, 소득파악률을 넓히는 것 등 복지재원 마련을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강구해야 한다. 연말정산 개선,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도 분명 추진했어야 할 방편들 중 하나다. 박근혜 대통령을 선택한 국민은 이미 성향을 떠나 복지에 대해 기대하는 수준이 높아졌고, 이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의 반발은 더욱 커질 것이다. 여당이 합리적인 정책마저 무리하게 뒤집은 것도 복지를 포기했을 때 유권자로부터 선택받지 못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증세를 증세라 부르도록 허하는 일이다.

김희원 사회부장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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