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등록 : 2018.05.14 10:41
수정 : 2018.05.15 14:57

[김월회 칼럼] ‘스승’이라는 문명장치

등록 : 2018.05.14 10:41
수정 : 2018.05.15 14:57

문명이 생성되고 갱신, 유포되는 데는 도구나 매체 등이 필요하다. 인간이 타고난 역량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그렇다. 가령 도끼나 망치 같은 도구가 있어 문명이 싹트고 자랄 수 있었고, 기호나 문자 같은 매체가 있었기에 문명은 종횡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을 ‘문명장치’라고 부르곤 한다.

‘스승’은 그 가운데 비중이 사뭇 높았던 문명장치였다. 인류 역사에서 그것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를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중국 역사를 보면 군주라는 또 다른 문명장치가 고안됐을 때엔 그것도 이미 출현해 있었다. 최초의 군주로 여겨질 만한 이들이 등장했을 때부터 군주를 ‘군사(君師)’라고 불렀기에 그렇다.

여기서 ‘군사’는 “군주는 곧 스승”이란 뜻의, 더는 쪼갤 수 없는 한 단어다. ‘임금+스승’의 합성어가 아니었다. 곧 쓸모 있는 바를 가르칠 수 있었기에 비로소 군주가 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신화나 전설 속 군주가 하나같이 백성에게 문명의 이기를 전수하고 그들을 가르쳐 한층 잘살 수 있게 해준 문화 영웅인 데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신화나 전설 시대에서나 그랬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유교 경전인 ‘대학’을 해설하면서 “하늘이 명을 내려 천자를 억조창생의 군사로 삼아 그에게 만민을 다스리고 가르치게 했다”고 한 데서 목도되듯이 군주는 곧 ‘군사’여야 한다는 관념은 전근대시기 내내 이어졌다.

사실 이는 별로 특이할 바 없는 현상이었다. 교육 없이 문명이 갱신되고 전승될 수 없음을 감안할 때 군주의 요건으로 가르치는 능력을 꼽음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여 군주만이 아니었다. 신하인 관리들도 백성을 실질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역량을 기본으로 갖춰야 했다. 어느 시기든 통치층은 집권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했는데, 고대 중국에선 가르침을 통해 피지배층에 실질적 도움과 이로움을 안겨줌으로써 이를 증명한 셈이었다. 학식과 덕목을 갖춘 이를 가리켰던 군자(君子)가 고대엔 주로 관리란 뜻으로 쓰였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가르칠 바가 없으면 관리가 되지 못했으니, 관리라고 하면 으레 학식과 덕목을 갖춘 군자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관리 지망생에게 좋은 스승, 곧 배울 만한 역량을 두루 갖춘 이와의 만남은 출사의 제일가는 관건이 되었다. 문명의 주요 화두가 됐음이다. 중국문명의 기획자답게 공자도 이에 주목하였다. 그는 “옛것을 익히고[溫故] 새것을 알면[知新]”, 곧 “온고지신” 하면 스승이 될 만하다며 스승의 자격을 논했다. 일반적 이해와 달리, 그는 누구든지 옛것과 새것 모두를 알고 있으면 이롭다는 일반론이 아니라 ‘스승론’을 전개했던 셈이다. 곧 스승은 모름지기 옛것과 새것, 달리 말해 모든 것에 대해 밝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천명했던 것이다.

이는 스승의 조건을 다름 아닌 ‘알고 있음’에서 찾은 것이다. 이를 배우는 이, 곧 학생 입장에서 다시 표현하면 선생은 ‘배울 만한 것’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배울 만한 것이 있어야 비로소 스승으로 삼게 된다는 뜻이다. 이에 근거하면 학교의 교사만을 스승으로 삼을 필요가 사라진다. 당대 중엽의 석학 한유가 도(道), 곧 진리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음이니 연장자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만을 스승으로 삼을 까닭이 전혀 없다고 단언한 것처럼 말이다. 사제는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앎[知]을 매개로만 맺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사제 간의 정이니 제자 사랑, 감사의 마음 같은 말들이 운위되지만 사제라는 관계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앎을 기초로 형성된다는 증언이다.

나아가 공자가, 하늘은 계절의 순환과 만물의 생멸을 통해 가르침을 전한다고 했듯이 우주 삼라만상에도 배울 만한 바들이 내장되어 있다. 꼭 사람에게서만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교학상장(敎學相長)”(‘예기’), 그러니까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를 성장시켜준다고도 한다. 스승과 학생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인 동시에 학생이 된다는 말이다. 사제지간이 반드시 인간 사이에서만 또 수직적 질서를 바탕으로만 이뤄져야 할 필연적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누구나 배우는 이면서 동시에 가르치는 이가 될 수 있다는 통찰이다.

이맘때면 스승의 날 존속을 둘러싸고 회의적 반응이 일곤 한다. 동의한다. 스승의 날이 직업인으로서의 선생을 위한 날이라면 존속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를 스승이라는 문명장치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계기로 활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지식 기반 사회서 살고 있고, 장차 ‘평생공부’가 필수로 요구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만큼 이날을 계기로 ‘누가/무엇이 내 스승이었던 것일까’, 다시 말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앎은 어디로부터 왔을까’를 따져본다면 나름 의미가 있지 않을까도 싶다.

여기에 더해, 나는 누구에게 스승이었던 적이 있을까도 짚어본다면 한층 의미 깊을 듯하다. 불현듯 시구 한 구절이 떠오른다.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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