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사색의 향기]유제두의 눈물

입력
2014.07.17 20:00
0 0

나의 어린 시절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권투는 숱한 영웅을 탄생시켰다. 게으른 천재 허버트 강과 그의 라이벌 김현, 4전5기의 신화 홍수환, 필살의 롱 훅 염동균, 면도날 고생근, 최고의 테크니션 박찬희, 독일병정 김태식, 중량급의 지존 박종팔, 장난꾸러기 장정구, 모범생 류명우, 작은 타잔 김환진, 불멸의 파이터 김득구에 이르는 여러 선수들은 우리들의 우상이었다. 모두 일세를 풍미한 스타들이었지만 나의 영웅은 유제두였다.

유제두는 권투가 아름다운 스포츠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선수였다. 훤칠한 키에 흰 피부, 균형 잡힌 체격은 이른바 헝그리 복서들의 거친 인상과는 달랐다. 유제두는 막무가내식의 인파이터나 상대를 현혹하며 기회를 노리는 아웃복서가 아니었다. 인파이터와 아웃복서의 중간 정도라고나 할까. 링의 가운데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며 원투 펀치를 작렬시켜 조금씩 상대를 무너뜨리다가 기회를 포착하면 소나기 펀치로 승부를 내는 스타일이었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흰 팬츠를 입은 유제두가 고개를 숙인 채 상대를 노려볼 때면 산사자 퓨마가 연상되곤 했다. 깡촌에서 태어나 오직 주먹하나 믿고 상경한 유제두는 갖은 고생을 하다 일본의 변칙복서 와지마 고이치를 KO로 눕히고 세계 챔피언이 되자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점심을 함께 하고 영화 ‘눈물 젖은 샌드백’을 찍을 정도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와지마 고이치와의 재경기에서 세계타이틀을 뺏겼지만 아직 중량급의 전설이었던 ‘늙은 사자’ 유제두가 무명선수에게 충격의 KO패를 당했다. 그 경기는 타이틀이 걸리지 않았지만 승자가 세계 챔피언에 도전할 기회를 갖는 경기였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와 권투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유제두에게 KO패, 정확히는 TKO패를 안긴 그 선수의 이름은 굳이 거론하지 않겠다. 경기 초반부터 고전을 거듭하다 10회에 들어 코너에 몰린 유제두는 한 손으로 로프를 잡고 고개를 떨군 채 무방비 상태로 펀치를 받아냈다. 경기를 포기한 그의 모습을 본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키자 유제두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의 패배에 여러 추측이 있었지만 상대방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혔다. 그가 흘린 눈물은 방심으로 대사를 그르친 자신에 대한 후회와 자책 때문이리라.

그 뒤 유제두는 하락세를 면치 못하다가 은퇴했다고 하지만 나의 기억은 그렇지 않다. 몇 달 뒤의 재기전에서 유제두는 전성기 때의 모습을 다시 보여 주었다. 전성기 시절 유제두는 웅크린 자세로 상대를 노려보며 다리를 뒤쪽으로 살짝 살짝 드는 특이한 동작을 하곤 했다. 그 동작은 몸 상태가 최상일 경우에나 하던 특유의 버릇이었는데 그 동작을 재기전에서 다시 보게 되니 반가웠다. 고양이가 생쥐를 앞에 두고 놀리는 것과 비슷한 움직임이라고나 할까. 두려워하는 상대를 농락하며 승리를 자축하는 대선수의 모습에 관중들은 환호했다. 건재를 당당히 과시한 유제두는 예전의 영광을 온전히 되찾지는 못했지만 동양챔피언 타이틀을 몇 차례 더 방어한 후 팬들의 환호 속에 은퇴했다. 유제두를 이긴 무명선수는 세계 타이틀 도전 기회를 얻었지만 “권투가 이렇게 재미없을 수도 있다”는 악평을 듣는 등 졸전을 거듭하다 사라지고 말았다.

유제두의 눈물과 재기에 대해 길게 쓴 것은 다름이 아니다. 모든 진정한 스포츠는 인생을 닮는다고 했다. 방심은 천하의 유제두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다시는 정상 도전기회를 갖지 못하게 했다. 상대의 방심 탓에 승리를 줍고 벼락출세한 무명선수는 실력 부족으로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유제두는 절치부심해 재기에 성공한 후 명예로운 은퇴를 맞이했다. 방심은 가장 큰 적이고 실력으로 얻지 않은 행운은 독이라는 사실, 그리고 최선을 다하면 재기의 기회는 언제고 다시 올 수 있다는 진리를 말하고 싶다. 세월호 참사에 슬퍼하다 선거를 치르고 월드컵 중계를 보다 보니 어느덧 올해의 절반이 지났다. 재기라는 거대한 목표가 아니라 이 모진 세상에서의 자존감 확인을 위해서라도 이런 저런 미련을 훌훌 털고 다시 노력을 시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