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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의 배신

입력
2014.12.14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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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권리 쟁취는 투표로 이뤄졌다. 그러나 만장일치 산물은 아니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전원합의는 존재키 어렵다. 바람직한 의사 결정 조건도 아니다. 오염되기 십상이어서다. 성소수자 차별 금지 조항이 포함된 인권헌장을 서울시가 폐기하면서 거론한 이유-“만장일치가 아니니 합의 실패로 간주한다”-는 그래서 반(反)민주적이다. 대선 도전을 염두에 두고 지지 층 확대를 도모 중인 박원순 서울시장이 타산에 맞추느라 궤변까지 불사한 꼴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금껏 권리 쟁취는 투표로 이뤄졌다. 그러나 만장일치 산물은 아니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전원합의는 존재키 어렵다. 바람직한 의사 결정 조건도 아니다. 오염되기 십상이어서다. 성소수자 차별 금지 조항이 포함된 인권헌장을 서울시가 폐기하면서 거론한 이유-“만장일치가 아니니 합의 실패로 간주한다”-는 그래서 반(反)민주적이다. 대선 도전을 염두에 두고 지지 층 확대를 도모 중인 박원순 서울시장이 타산에 맞추느라 궤변까지 불사한 꼴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성소수자 권리 부인은 전향이다. 인권변호사였던 서울시장은 이제 대선 주자다. 스텝이 꼬인다. 만장일치여야 합의라니. 민주주의 부정이다. 동성애는 존재여서 찬반 대상이 아니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의 ‘규제 단두대’ 발언이 논란이 됐을 때 단두대의 역사를 들춰봤다. 그러다 오랜만에 가슴을 쿵덕쿵덕 뛰게 만드는 한 여성을 만났다. 프랑스 혁명기를 불꽃처럼 살다 간 ‘여성 혁명가’ 올랭프 드 구주(1748~1793)가 그 주인공이다. (…)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그 의사 표현이 법이 규정한 공공질서를 흐리지 않는 한 연단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 여성의 참정권 역사에 관심 있는 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이 말은 그가 1791년에 발표한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 선언’의 일부다. (…)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의 저자 브누아트 그루는 그를 일컬어 “성차별주의가 인종차별주의의 한 변종임을 이해하고 여성 박해와 흑인 노예제도에 동시에 맞서 일어선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썼다. 여성과 노예뿐이 아니다. 그는 노인과 어린이, 사생아, 실업자 등 모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부당한 인식과 처우를 바꾸기 위해 싸웠다. 이국의 낯선 여성 혁명가를 새삼스레 불러낸 것은, 그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의 투쟁과 희생을 통해 정착한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너무도 쉽게 거스르는 일이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일 세계 인권의 날에 맞춰 선포될 예정이던 ‘서울시 인권헌장’이 성소수자 차별금지를 둘러싼 논란 끝에 무산된 사건 말이다. 인권헌장 제정은 ‘인권변호사’ 출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선거공약이었다. 몇몇 전문가들이 뚝딱 지어 내놓는 게 아니라 시민들이 주도해 더 의미가 컸다. (…) 시민위원회는 11월 28일 표결을 실시해 압도적인 찬성으로 이 조항이 포함된 원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합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효를 선언했다. 이 와중에 박 시장이 기독교단체 면담에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소수자 단체들이 시청 점거농성에 나섰다. (…) “동성애를 지지 또는 반대한다”는 언명은 “여성이나 흑인의 존재를 지지 또는 반대한다”는 말처럼 성립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이미 상식에 속한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박 시장이 “제 삶을 송두리째 부정 당하는 상황”을 무릅쓰고, 게다가 매우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인권헌장을 무산시킨 까닭을 이해하기 어렵다. 동성애 혐오세력이 활개를 치는 현실에서 시민들의 만장일치로 인권헌장이 탄생하는 화기애애한 상황을 꿈꾸는 순진무구함이라니…. 대권 도전을 의식한 행보라는 해석이 유력한데, 그렇다면 더욱 혀를 찰 일이다. (…) 박 시장이 인권헌장 제정을 손쉽고 의미 있는 이벤트 혹은 치적으로 생각했다면 자신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올랭프 드 구주의 삶을 찬찬히 되새겨 보길 바란다.”

-올랭프 드 구주와 박원순(한국일보 ‘메아리’ㆍ이희정 논설위원) ☞ 전문 보기

“생각해보면 보통선거, 주권 독립, 주 5일 노동제까지 우리가 쟁취한 당연의 권리는 단 하나도 빠짐없이 ‘시기상조의 시기’를 겪었다. 사실 시기상조의 논리야말로 권리의 도래를 막아온 가장 설득력 있고 위협적인 장애물이었다. (…) 아마 우리가 무엇을 원하든, 손에 넣지 못했다면 그것이 시기상조이기 때문일 터다. 하지만 시기가 도래하여 무언가를 성취해본 적이 있긴 있었나? 역사를 통틀어 모든 시기는 성취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이 바로 적당한 시기’란 말이 거론되는 순간이야말로 영원히 시기상조다. (…) 민주주의 아래서 시기상조의 논리는 투표로 실현된다. 특히 만장일치가 요구될 때 그렇다.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의 시민 만장일치가 무산되었다는 이유로 아예 폐기해버린 서울시의 결정이 얼마나 흥미로운 모순을 품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마치 지난 선거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만장일치로 당선되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절반 가까운 서울시민이 박원순 시장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그의 당선이 시기상조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의심일 터다. 그러나 반대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박원순 시장의 발언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명백히 현존하는 세계의 양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투표로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 “겨울의 존재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아무런 문장값이 없다. 이 문장의 속뜻은 “나는 겨울이 싫다. 그것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이다. (…) 성소수자 권리 조항 삽입이 만장일치 무산으로 폐기되었듯이, 성소수자 권리 조항의 폐기를 두고 투표한다면 만장일치에 이를 가능성이 없다. 만장일치라는 이름으로 의사결정 구조의 비대칭성을 정당화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민주주의적 자살이다. (…) 동성애자의 권리가 만장일치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이성애자의 권리도 만장일치해야 존재하고, 여성의 권리도 만장일치해야 존재하고, 노동자의 권리도 만장일치해야 존재한다면, 민주적 권리는 모두 만장일치의 산물이어야 한다. 우리가 만장일치에 전적으로 기댄다면 세상에 남는 것은 딱 하나일 터다. 바로 만장일치 제도 그 자체다.”

-권리는 시기상조(12월 11일자 한겨레 ‘야! 한국사회’ㆍ손아람 작가)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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