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가명 뒤에서… 루이스 캐럴의 언어유희 잔치

알림

가명 뒤에서… 루이스 캐럴의 언어유희 잔치

입력
2015.09.04 16:01
0 0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작가

국내 소개 안 된 희귀작 모아 출간

수학·논리학 애정 가득한 우화와

희노애락 속 장난스런 글·그림 담아

‘운율? 그리고 의미? / 헝클어진 이야기’ 루이스 캐럴 지음·유나영 옮김· 워크룸프레스 발행·460쪽·1만4,000원
‘운율? 그리고 의미? / 헝클어진 이야기’ 루이스 캐럴 지음·유나영 옮김· 워크룸프레스 발행·460쪽·1만4,000원

“70%가 눈 한 짝을 잃었고_75%가 귀 한 짝을_80%가 팔 한 짝을_85%가 다리 한 짝을 잃었다고 치자. 이렇게 하면 딱 떨어질 거야. 그러면 얘야, 이 네 부분을 모두 잃은 사람은 최소한 몇 %일까?”

상이용사들의 긴 줄 옆을 지나가던 고모가 조카딸에게 느닷없이 문제를 낸다. 답은 뭘까. 부상을 모두 더해 310건이라 치고 이를 100명에게 분배하면 1명당 부상 3건, 그리고 10명은 4건. 따라서 정답은 10%. 땡! 조카딸의 답변은 “어쩜 그렇게 슬플 수가”다.

이 이야기는 영국잡지 ‘더 먼슬리 패킷’에 1880년 4월부터 연재된 10편의 ‘수학우화’ 중 하나다. 출제자는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하 ‘앨리스’)의 바로 그 루이스 캐럴이다.

거의 평생을 수학교수로 산 캐럴은 ‘앨리스’ 외에도 여러 편의 시와 소설을 썼다. 특히 시집은 세 권이나 남겼다. 이번에 출간된 ‘운율? 그리고 의미? / 헝클어진 이야기’는 1883년 펴낸 세 번째 시집 ‘운율? 그리고 의미?’와 잡지에 연재한 수학 우화를 번역한 것이다. ‘제안들’이란 이름으로 희귀문학 총서를 발행 중인 워크룸프레스는 앨리스 탄생 150주년을 맞아 다음 기준을 따라 희귀한 캐럴 선집을 만들어냈다. 첫째,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되지 않은 작품일 것, 둘째 작가 생전에 루이스 캐럴이란 이름으로 출간된 단행본일 것(캐럴의 본명은 찰스 럿위지 도지슨이다), 셋째 그림과 대화가 있는 책일 것.

첫 번째 기준에 의해 ‘앨리스’를 비롯한 대표작들이 제외되고, 두 번째 기준에 본명으로 발표한 시, 산문, 방대한 일기가 지워지고, 세 번째 기준에 ‘기호논리학’과 첫 시집 등이 삭제됐다. 남은 건 가명 뒤에서 펼쳐지는 글과 그림과 언어유희의 잔치다.

루이스 캐럴의 장편 연작시 ‘스나크 사냥’에 삽입된 헨리 홀리데이의 그림. 위쪽의 난간을 잡고 있는 인물이 빵쟁이다. 무의미와 말장난으로 점철된 캐럴의 시와 어딘가 기괴한 홀리데이의 그림이 좋은 한 쌍을 이룬다. 워크룸프레스 제공
루이스 캐럴의 장편 연작시 ‘스나크 사냥’에 삽입된 헨리 홀리데이의 그림. 위쪽의 난간을 잡고 있는 인물이 빵쟁이다. 무의미와 말장난으로 점철된 캐럴의 시와 어딘가 기괴한 홀리데이의 그림이 좋은 한 쌍을 이룬다. 워크룸프레스 제공

캐럴은 생전에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시를 썼다고 알려졌는데, 대부분이 ‘앨리스’에서 등장인물들이 주고 받는 말도 안 되는 대화 같은 난센스 시다. 가장 유명한 ‘스나크 사냥’은 총 8편의 연작시로 빵쟁이, 변호사, 당구장 직원, 은행가, 모자쟁이, 중개상 등이 한 배에 올라 스나크를 잡으러 떠나는 이야기다. 스나크 사냥을 위해 뭉쳤지만 저마다 아귀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떠들어대며 헛발질을 반복하는 모습은 19세기 영국에서 맹위를 떨쳤던 모험담을 겨냥한 듯 보인다. 마지막에 스나크를 발견한 빵쟁이는 “부?줌”이란 말과 함께 돌연히 사라지고, ‘스나크’와 ‘부줌’이라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 그 단어들도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린다.

수학 우화 ‘헝클어진 이야기’에선 수학과 논리에 대한 캐럴의 집착 어린 애정을 볼 수 있다. 작가는 매월 잡지에 수학 문제가 포함된 우화를 실은 뒤 다음 호에서 독자들이 가명으로 보내온 다양한 답변들을 신랄하게 평가, 등수를 매겨 발표했다. 앞서 소개한 상이용사 문제에서 작가는 ‘델타’라는 독자가 세운 두 가지 가정 “눈 한 짝을 잃지 않은 모든 사람은 귀 한 짝을 잃었다고 하자” “두 눈과 두 귀를 모두 잃지 않은 사람은 팔 한 짝을 잃었다고 하자”를 소개하며 논평한다. “전쟁터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진정 음울하다. 두 눈과 두 귀와 양팔을 모두 잃은 뒤에도 계속해서 싸우는 한 전사를 상상해보라!”

짐짓 슬퍼하는 척하지만 손바닥으로 가린 입은 웃고 있음에 틀림 없다. 부상 당한 병사들을 보며 슬퍼하는 조카딸에게 작가는 고모의 입을 빌어 말한다. “슬프지_만 이를 산술적으로 보면 매우 흥미롭단다.” 아, 캐럴. 희로애락의 전장에서도 셈과 말장난을 멈추지 않을 장난꾸러기.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