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현 기자

등록 : 2018.04.07 16:00
수정 : 2018.04.07 18:03

[뒤끝뉴스] 본전도 못 찾은 김영철의 ‘서툰 사과’

등록 : 2018.04.07 16:00
수정 : 2018.04.07 18:03

“남측서 천안함 주범이란 사람이 저”

46명 희생시킨 만행을 농담 소재로

정부, 대화국면 악재에 곤혹… 침묵만

“우리 국민 능멸”… 성토장 된 정치권

지난 3일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평양 미산각(통일전선부 소속 초대소)에서 남측 예술단을 초청, 환송 만찬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남측에서 천안함 폭침 주범이라는 사람이 저 김영철입니다.”

전날 우리 예술단 평양 공연 취재가 제한된 데 대해 사과하는 자리였습니다. 2일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은 남측 기자들한테 자기를 저렇게 소개했습니다.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희생된 우리 장병이 물경 46명입니다. 이 비극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한미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손님을 홀대한 것도 사과거리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정작 북한이 사과해야 할 일은 학살에 가까운 8년 전 만행일 터입니다.

가볍게 여기면 농담입니다. 하지만 고의적 조롱으로 볼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튿날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천안함 폭침은 조작 모략극”이라고 주장하는 논평을 실었습니다. 공교로운 일로 보자니 영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게 사실입니다. 미안하다면서 오히려 사과 받는 사람 속을 긁어놓은 셈입니다.

천안함 폭침 당시 대남 공작을 총괄하는 정찰총국장 자리에 앉아 있었던 터라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온 김 부위원장입니다. 게다가 지난달 26일은 천안함 폭침 8주기였습니다. 김 부위원장의 ‘헛나발’(허튼소리)은 그날로부터 불과 1주일도 안 된 시점에 나왔습니다. 유가족 등 100명 남짓만 모여 평택 해군 2함대에서 치러진 천안함 추모식은 남측에 잘 지내자고 손짓한 북한을 배려하듯 조용했습니다.

김 부위원장이 던진 ‘농담 반 조롱 반’ 인사말 탓에 정치권은 성토장이 됐습니다. 정부를 상대로 보수야당들이 맹공을 가했습니다. 4일 유승민 바른미래당 공동대표는 “우리 국민을 능멸하는데 청와대ㆍ통일부ㆍ국방부가 모두 할 말이 없다고 하고 있다. 어이가 없어 제가 할 말이 없다”고 했고, 전희경 한국당 대변인도 “저 김영철이다, 이 말 한마디에 대한민국이 능욕당했다”며 날을 세웠습니다. 곤혹스러운 정부와 여권은 “천안함 폭침 주도자는 특정이 안 됐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북한 소행이 맞기는 하지만 김 부위원장이 핵심 배후인지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다분히 대화 국면임을 의식한 대응이었습니다.

천안함 폭침 발언을 빼고 보면 김 부위원장의 사과 자체는 파격입니다. 탈북민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6일 “김 부위원장 정도 되는 고위급 인사가 고개 숙여 사과하는 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시 없이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남측 손님들을 북측이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라는 거지요. 김연철 인제대 교수도 “과거에는 드물었던 새롭고 이례적인 모습”이라고 평가했습니다.

1일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평양공연을 온 남측 예술단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올 들어 한반도 정세의 변화 속도는 어마어마합니다. 어쩌면 시동을 건 북한조차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최고위에서 전격적으로 내려진 결정이 체제 맨 아래까지 스며들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 공연장을 찾아 “내가 레드벨벳을 보러 올지 관심이 많지 않았냐”며 파격적 유화 공세를 펴는 와중에(1일) 노동신문은 유엔 인권 결의에 찬성한 우리 정부 성명을 거론하며 “용납 못할 망동”이라고 비난합니다(4일). 머리와 손발이 따로 노는 모양새입니다.

치밀한 계산에 따른 의도적 불일치라기보다 과도기에 어쩔 수 없는 혼선으로 이를 보는 전문가가 적지 않습니다. 밖에는 전향적 태도를 보여도 안으로는 동요가 일어나지 않게 단속할 필요가 정권에게 있었으리라는 거지요.

물론 북한의 유화적 태도가 화전(和戰) 양면 전술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정말 핵무기를 포기하고 평화를 만들어 볼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보려는, 의도가 불순한 술책일 수 있습니다. 지나친 의미 부여가 금물인 이유입니다. 더 지켜봐야겠지요. 다만 분단 이후 남북이 대치하며 오랜 몸살을 앓고 있는 한반도에 평화의 단초가 마련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아 부드럽게 나오는 상대방의 자세를 폄훼하고 의심하기만 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 조심하는 정부의 태도에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속 시원하게 “네가 범인 아니냐”고 몰아세워 버리면 정부도 편합니다. 공분을 산 일인 만큼 남남갈등 여지도 적겠죠. 하지만 지금은 북한의 사과를 마냥 기다리기보다 북한의 전향을 활용할 필요가 더 큰 시기 아닌가 싶습니다.

천안함 폭침 발언과 관련한 청와대와 외교안보 부처들의 침묵은 북한을 사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북한을 상대로 우리가 바라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전략으로 보는 시각이 더 현실에 가깝습니다.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과민 반응이 납득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정부 입장을 헤아려 볼 필요는 있지 않나 싶습니다. 천안함이 지지층 결집을 위한 불쏘시개로 쓰이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되는 건 물론입니다.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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