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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동료 시민들을 위로하며

입력
2016.11.1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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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광화문 집회에 다녀왔다. 근 20년 만에 참가하는 대규모 집회였다. 무엇인가가, 그대로 마음속 깊숙이 담고만 있기에는 너무 무겁고 고통스러운 부끄러움이, 나를 광장으로 이끌었다.

몇 주 전,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언론을 통해 폭로되면서, 적지 않은 나날 동안 숱한 감정의 변화를 겪었다. 처음에는 머리가 멍한 채로 ‘멘붕’ 상태였고, 곧바로 가슴 속 깊이 수치심이 자리 잡았다. 그런 수치심에 대한 방어기제였는지 이내 분노가 솟구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느낌에 걷잡을 수 없는 우울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내가 왜 저 사람(들) 때문에 이토록 멘붕을 겪고, 수치스럽고, 화나고, 우울해야 하나. 억울하기도 전에 황망하기 짝이 없다. 위로받고 싶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정치인들도 만났고 집회에도 나갔지만,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나 자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로 한다. 동료 시민 중에 비슷한 위로가 필요한 이가 있다면, 그에게도 조금이나마 이 위로의 말을 나눠주고 싶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 저는 당신들의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 물론, 저는 실제로 이곳에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리더십 없는 이곳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 보통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왔는데, / 온전히 우리가 힘겹게 버텨 온 나라의 참모습이 이런 것이었습니까.

아이들에겐 열심히 공부하라 하고 / 대학생들에겐 열심히 스펙 쌓으라 하고 / 직장인들에겐 죽도록 열심히 일하라 해놓고선

짐짓 말 위에 올라 비웃는 얼굴로 / 정신없이 노력하는 일개미들을 내려다보며 / 몽매하고 건방진 아이에게 고작 그 더러운 삶으로 가르친 한마디가 / ‘돈 없는 네 엄마 아빠를 원망해’ 인… / 이런 천박하고 무례한 사회를 우리가 용인해 왔던 겁니까.

촛불이 타올랐습니다. / 광화문에 일렁이는 이 불꽃은 그간의 아집과 무지를 사르면서 / 최소한의 상식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시민들의 마지막 몸부림일 것입니다.

다짐해 봅니다. / 우리 아이들에게만큼은 부끄러운 나라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 좀 더 공정하고, 자유롭고, 정의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겠다고 / 우리 아이의 행복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꺼트리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외칩니다. / 한평생 열심히 살아온 너희의 자랑스러운 엄마 아빠가 / 저열한 삶에 한껏 의기양양했던 저들 따위에게 능멸당할 이유는 없다고.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부끄러움은 저들의 것입니다. /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승리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승리할 것입니다. / 이제, 이 나라를 다시 자랑스럽게 만듭시다.

오랜 기간, 가난한 독재의 환상 속에 저 사람들이 군림해 왔지만 / 저들에게 투표했던 분들도 부끄러워만 하진 마십시오. 여러분 잘못이 아닙니다. / 대신, 더 나은 민주적 리더십이 이 나라에서 꽃피울 수 있음을 이젠 믿어 주십시오.

여러분, 저는 당신들의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 저는 아직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 지금 저는 여러분 마음 곳곳에 아주 조금씩 흩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정의롭고 현명한 마음이 하나로 모일 때, / 여러분이 다 함께 더 나은 삶의 리더가 되고자 할 때, / 저는 장차 여러분의 아이들과 함께 커서 이 땅에서 환히 미소 지을 겁니다. / 민주주의 만세!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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