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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미치광이 게임

입력
2017.05.03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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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9일 북한이 5차 핵실험을 했을 때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김정은의 정신상태가 통제불가능"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트럼프가 줄곧 "미치광이(maniac)가 핵무기를 갖고 있다"며 김정은을 공격하던 때였다. 하지만 다음날 뉴욕타임스는 '북한은 미친 게 아니라 지나치게 이성적'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북핵은 생존을 위한 냉철한 계산의 산물이며 '미치광이 이론'을 철저히 활용한 고도의 노림수"라고 분석했다. 국제정치이론의 하나인 '미치광이 이론'이 우리나라에서 주목받은 것은 그 즈음이다.

▦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고안한 것으로 알려진 이 이론은 자신을 상대에게 비이성적 미치광이로 비치게 해 공포감을 주고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전술을 일컫는다. 닉슨은 1969년 10월 아시아 등 해외주둔 미군에 핵전쟁 대비령을 내리는 한편, 자신이 공산주의에 대한 강박감으로 항상 핵 버튼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는 이야기를 흘렸다. 북베트남을 배후 지원하던 소련이 위협을 느껴 호치민을 파리 협상테이블로 끌어낼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이 전략은 기대만큼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 이 전략이 새삼 각광받은 것은 '예측 불허'와 '규범 무시'라는 협상술로 상대를 당황케 하고 가치보다 이익을 앞세워 적과 아군을 모두 곤혹스럽게 만든 트럼프 덕분이다. '하나의 중국' 원칙 파기와 무역을 지렛대로 중국을 압박하고, ‘모든 옵션'과 '최대의 압력과 개입'으로 북한의 핵ㆍ미사일 도발을 잠재운 그의 솜씨는 미치광이 게임의 전형을 잘 보여 준다. 그런 트럼프가 이번엔 4월 위기설 진화에 안도하던 한국의 뒤통수를 치며 대선정국 한가운데로 사드 배치 청구서와 한미 FTA 재협상ㆍ폐지 카드를 던졌다.

▦ 북한은 최근 관영 매체를 통해 "트럼프 특유의 협상술인 미치광이 전략이 다른 나라들에는 통했을지 몰라도 자위의 핵을 틀어쥔 조선에는 추호도 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외무성 담화는 그제 "김정은 동지의 무비의 담력과 탁월한 지략으로 4월 위기국면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자찬했다. 같은 날 트럼프는 김정은을 '꽤 똑똑한 녀석’(pretty smart cookie)이라고 칭하더니 돌연 "적절한 상황이 되면 그를 만날 것이고 영광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들이 미치광이 게임을 벌이는 사이에 우리는 자중지란에 빠졌다. 이유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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