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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병 여고생, PD 꿈 쫓아 이화여대 입학

입력
2016.02.2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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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아버지와 같은 질환

생계 위해 고교 졸업 후 취업 선택

"도전이라도 해 보자" 진로 바꿔 결실

이화여대 신입생 정가을씨가 17일 서울 구로동 구로디지털단지에서 “PD의 꿈을 꼭 이루겠다”며 각오를 다지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이화여대 신입생 정가을씨가 17일 서울 구로동 구로디지털단지에서 “PD의 꿈을 꼭 이루겠다”며 각오를 다지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과사’라는 말이 과거 사진의 줄임말인 줄 알았는데 과 사무실이라네요.”

입학을 앞두고 캠퍼스 은어를 몰라 걱정이라면서도 정가을(21)씨의 입가에는 연신 미소가 번졌다. 16학번으로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에 입학하게 된 새내기 정씨는 17일 “아직도 대학 합격증을 받아 든 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환하게 웃었다.

정씨가 웃음을 찾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불운은 정씨가 고교에 입학한 2011년 시작했다. 아버지가 ‘다발성내분비종양’ 말기로 1년여의 시한부 진단을 받은 것. 다발성내분비종양은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도 앓았던 병으로 국내에서는 환자가 몇 명 없는 희귀 질환이다. 설상가상으로 정밀검사에서 정씨와 대학생 언니에게도 같은 병이 발견됐다. 중학교 시절부터 방송반을 하며 방송 PD를 꿈꾸며 특성화고(이화여대병설미디어고)에 진학한 정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정씨는 “외벌이를 하던 아버지가 떠나면 당장 생계를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학업을 마쳐야 하는 언니가 나보다 병이 깊었고, 결국 내가 우리 집의 가장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몇 달의 고민 끝에 정씨는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미디어 전공과 대학 진학을 모두 포기하고 취업반을 선택했다. 아버지의 빈 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병세가 악화한 아버지는 그 해 여름 세상을 떠났고, 정씨는 취업준비에 몰두했다. 정씨는 “좋아하는 미디어 관련 공부를 포기하고 자격증 준비와 자기소개서 작성, 모의 면접에 열중해야 했다. 하지만 방황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어머니와 아픈 언니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정씨는 홀로 취업 한파를 뚫고 나아갔다. 최종면접에서 떨어지기를 반복하던 중 2013년 10월 한 공기업에 고졸 특채로 취업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공기업에 취직했지만 누구보다 가슴이 아파했던 것은 가족이었다. 정씨가 중학생부터 열망했던 PD의 꿈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들의 격려 속에 정씨는 다시 대학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 회사를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쇠약해 졌지만 ‘도전이라도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병가를 내고 입시공부에 매달렸다. 그는 “‘죽기 전에 못 먹은 밥보다 못 먹은 꿈이 생각난다’는 글귀를 보고 더 늦기 전에 꿈을 향해 나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병원과 재수학원과 독서실을 오가며 ‘닥치는 대로’ 공부를 했다”는 정씨는 “생각지도 못한 학교에 입학하게 돼 모든 것이 꿈만 같다”고 했다.

쉴 새 없이 5년여를 달려온 정씨는 대학 입학을 앞두고 설렘 반 두려움 반이다. 대학 문화도 익숙지 않은데다가, 나이로 치면 ‘삼수생’ 언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생 경험에 있어서는 동기들보다 ‘조금은’ 선배라고 자부한다. 정씨는 “동기들이 ‘자기소개서는 어떻게 잘 써요?’라고 물어보면 답할 수 있는 편한 언니가 되고 싶다”며 밝게 웃었다.

이현주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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