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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미르ㆍK재단과 강요된 선행

입력
2016.10.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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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K스포츠재단 입구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K스포츠재단 입구

“(미르나 K스포츠) 재단들이 퇴임 후를 대비해서 만들어졌다는데 그럴 이유도 없고 사실도 아니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2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은 거짓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소임을 다하고 제가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어떠한 사심도 없다”는 말 역시 어느 정도는 진심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진정 퇴임 후를 위한 설계였다면, 모금부터 가동까지 이렇게 날림으로, 도무지 정교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얼렁뚱땅 재단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적 목적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으로 두 재단 설립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법률의 적용을 받는 공익재단은 왜 만들었는가 못지 않게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도 중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불거지는 논란에 대한 박 대통령의 언급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갑갑함은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화체육분야를 집중 지원하고 우리 문화를 알리며 …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수익창출을 확대하고자 기업들이 뜻을 모아 만들게 된 것이 두 재단의 성격으로 알고 있다” “과거에도 많은 재단들이 기업의 후원으로 이런 사회적 역할을 해왔는데 전경련이 나서고 기업들이 이에 동의해 준 것은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의미 있는 사업에 대해 의혹이 확산되고 인신공격성 논란이 계속 이어진다면 문화융성을 위한 기업들의 순수한 참여의지에 찬물을 끼얹어…한류 문화확산과 기업의 해외진출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박 대통령은 정말로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문화예술 지원과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기업들이 순수하게 뜻을 모으고, 사회적 역할 차원에서 전경련이 앞장섰다고 믿는 걸까. 대기업들이 거액을 출연했다고 해서 진정 재단목적에 동의했다고 들은 걸까.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단언컨대 이런 일에 자발적으로 돈을 낼 기업은 세상에 없다. 연간 문화예술지원에 아무리 수백~수천억원을 쓰는 대기업이라도, 대상과 방법이 명확하지 않은 사업에는 금액이 얼마이든 돈을 쓸 수 없고 써서도 안 되는 게 원칙이다. 시작점이 안종범 수석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정부 고위층 누군가가 전경련 이승철 부회장에게 취지를 얘기했을 것이고, 이 부회장은 주요 대기업들에게 청와대의 뜻이라고 전했을 것이고, 대기업들은 대통령 관심 과제라니까 용도불문하고 그냥 할당된 금액을 냈을 것이고…. 굳이 이런저런 음모론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그런 과정을 거쳐 두 재단은 탄생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릴 미르재단이나, 스포츠활성화를 위한 K스포츠재단이나 어쨌든 다 대한민국을 위한 좋은 일이니까 기업들도 의당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기업은 국가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이른바 ‘보국(報國)론’적 기업관을 가진 게 확실해 보인다. 해외에서도 기업들에겐 사회적 책임(CSR)이 강하게 요구되고 있는 만큼, 그 연장선상에서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애국적 선행이라 해도 국가는 기업에 강요해선 안 된다. 공익적 용도라고 해도 국가는 세금 이외에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기업에 어떤 지출도 요구해선 안 된다. 국가가 강제하는 순간 규제가 되고, 지출을 요구하는 순간 준조세가 되고 만다. 선한 목적이냐 나쁜 의도냐는 그 다음 문제다.

하긴 늘 이런 식이었다. 벤처기업 육성을 위해 대기업들에게 창조경제혁신센터를 하나씩 할당한 것, 취업난 해결을 위해 청년희망펀드를 조성하면서 결국은 대기업과 금융기관 임직원들이 가입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것, 그리고 이번 재단설립까지. 선행을 위한 강제, 그 역설의 연속이었다. 퇴임용이든 아니든, 최순실이 농단을 했든 안 했든, 이 재단들은 잘못된 방식으로 만들어진 만큼 곧바로 해산되는 게 옳다.

전통적으로 보수주의의 핵심은 시장에 대한 정부개입을 최소화하고 기업 자율을 최대한 보장하는 데 있다. 이 점에서 과연 박근혜 정부를 보수정부라 일컬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sc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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