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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년 전 영국서 최후의 '동성애 사형'

입력
2015.11.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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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11월 27일

제임스 프랫과 존 스미스의 교수형 소식을 전한 당시 신문 삽화.
제임스 프랫과 존 스미스의 교수형 소식을 전한 당시 신문 삽화.

1835년 11월 27일, 영국인 존 스미스(John Smith)와 제임스 프랫(James Pratt)이 교수형 당했다. 동성애 죄목으로 영국에서 사형 당한 최후의 희생자였다. 당시 스미스는 40세, 프랫은 30세였다.

그들은 1835년 8월 29일 오후 윌리엄 보닐(Willaim Bonillㆍ당시 68세)의 런던 사우스워크 셋방에서 체포됐다. 보닐이 게이였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두 남자는 그의 셋방을 밀회의 공간으로 빌려 쓰곤 했다고 한다. 남자들의 방문이 잦아 ‘이상한’ 소문이 돌자 호기심 많은 집주인이 그날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가 발코니 창문을 통해 둘이 부둥켜 안고 있는 모습을 훔쳐봤다. 둘은 현행범으로 체포됐고, 당시 영국 형사법(Person Act 1828) 15조 풍속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중앙형사법원은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보닐에게는 방조 혐의로 14년 유배령이 선고됐다.

프랫은 아내와 자녀를 둔 가장이었다. 영국 신문들은 프랫의 지인들이 증인으로 출석, 그의 선량함을 잇달아 증언했다고 보도했다. 스미스는 미혼의 노동자라고 보도한 데도 있고, 하인으로 일하는 기혼자라고 소개한 데도 있다. 재판 보조법관이던 치안판사 헨슬레이 웨지우드(Hensleigh Wedgwood)는 사형이 가혹하다며 감형을 청하는 탄원서를 내무부에 제출했다. 그들이 “타락한 인간들이긴 하지만 만일 부자여서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안정적인 공간이 있었다면 드러나지도 않았을 범죄”라는 점, 그들의 비행이 끼친 피해가 크지 않다는 점 등을 들었다. 하지만, 그 해 9~10월 중앙형사법원의 사형수 17명 가운데 11월의 왕실특사에서 감형 받지 못한 것은 스미스와 프랫 둘 뿐이었다.

둘은 오전 8시 뉴게이트 교도소 정문에서 공개 처형됐다. 29일자 ‘The Examiner’는 “구경 나온 사람은 거의 없었고, 두 죄수는 끝까지 자신들의 유죄 사실을 부정했다(denied their guilt)”고 보도했다. 동성애가 왜 죄냐는 의미가 아니라 섹스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던 듯, 기사는 집 주인의 목격담을 그들의 주장 뒤에 달았다.

디킨스의 'A visti to Newgate'에 실린 뉴게이트 감방 스케치.
디킨스의 'A visti to Newgate'에 실린 뉴게이트 감방 스케치.

작가 찰스 디킨스는 형 집행 직전 뉴게이트 감옥을 탐방, 여러 수감자들과 함께 두 사형수의 모습을 살펴보고 두려움에 기진맥진한 모습을 ‘Sketchs by Boz’라는 매체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무겁고 어두운 작품 ‘올리버 트위스트’를 월간 ‘벤틀리 미셀러니’에 연재(1837.2~39.4)하기 1년여 전이었다. 한편 보닐은 35년 11월 5일 다른 죄수들과 함께 호주로 유배돼 41년 4월 현지 병원에서 숨졌다.

인권단체 시리아인권관측소(SOHR)는 지난 9월 IS(이슬람국가)가 동성애자 10명을 공개 처형했다고 밝혔다. 180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에는 동성애를 법으로 처벌하는 국가가 40여 곳 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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