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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어느 쪽이든 불편한 건 매한가지일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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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어느 쪽이든 불편한 건 매한가지일 테지만…

입력
2018.04.20 1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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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처음부터 달랐다. 희끄무레한 얼굴에다 밤색 머리를 바가지처럼 자른 사내아이는 그 즈음 우리 주변에 없었다. 키는 얼마나 큰지 입학식 날 또래들 머리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아이 얼굴이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 애가 우리 반 반장이 됐다. 키가 커서 맨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아침마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하는 소리를, 키가 작아 맨 앞자리에 앉은 나는 영 좋지 않은 기분으로 들었다. 이상하게 그 애의 말씨에는 신경 거슬리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교실 뒤에서 소란이 일었다. “버내너! 미얼크!” 한 손에 바나나를, 다른 손에 우유병을 쥔 녀석이 사람 신경 곤두서게 하는 서울말로 지껄이고, 친구들이 한 입만 달라며 애걸했다. “내 고구마랑 누룽지 다 줄게. 제발 바나나 한 입만 응?” 그렇게 말하는 남자애가 하필 우리 동네 친구였다. 열통이 터진 나는 벌떡 일어서서 친구를 노려보며 성을 냈다. 네가 거지냐고, 바나나가 아무리 먹고 싶어도 사람 봐가며 부탁하라고.

그날 수업 마치고 집에 가는데 반장이 따라오며 시비를 걸었다. “네가 뭔데 학급 친구들 다 보는 앞에서 내 망신을 주냐”. 따지던 녀석이 인신공격으로 넘어갔다. 얼굴은 까맣고 키도 쪼그만 계집애…. 그러든 말든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드디어 아이의 입에서 이상한 말이 터져 나왔다. “야, 너. 설리번 선생님이 누군지나 알아?” 놀란 내가 돌아선 채 멀뚱거리자 아이의 얼굴에 기쁨이 번졌다. “것도 모르면서 잘난 체를 해?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 켈러를 가르쳐 주신 분이야.” 으스대는 그 놈 입가에 언니 가방에서 본 적 있는 헬렌 켈러 위인전을 꺼내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분노가 초인적 투지를 이끌어냈으리라. 내 입에서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똑똑한 너는 고열순 여사가 누군지 아냐?” 아이의 눈에 스치는 당혹감을 읽은 나는 냅다 돌아서서 달렸다. 더는 쫓아오지 못하게.

다음날 학교에 가자 녀석의 들볶임이 시작됐다. 고열순 여사가 누구냐고. 쉬는 시간마다 앞자리로 와서 묻던 아이는 집에 가는 길에도 따라붙어 똑같은 질문을 백 번 넘게 반복했다. 울먹이는 녀석의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렸지만 굳게 입을 다물었다. 한데 그 다음날이 되자 나를 쏘아보기만 할 뿐 녀석이 잠잠했다. 이상하다 싶었는데, 4교시 수업 마치고 청소하는 시간에 녀석의 엄마가 왔다. 아주머니와 담소하던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고열순 여사가 누구야?” “우리 외할머니 이름이에요.” 웃음과 격려를 가득 담은 두 분의 눈길에 마음이 풀린 나는 나붓나붓 이야기를 했다. 특히 아이들 앞에서 맛있는 걸 자랑만 하던 아이가 자기 망신당한 걸 복수하겠다며 헬렌 켈러도 아니고 설리번 선생님을 아느냐고 물어본 것이 기분 나쁘다고 강조했다. “정말 고마워. 오늘 이렇게 또 배우네.” 자기 아들만 역성들 사람은 아니라고 예상했지만, 아주머니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놀랐다. 그분은 내 두 손을 잡은 채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시고는, 곧 수업을 마치는 아들을 지프차에 태우지 않은 채 혼자 떠났다.

이 일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고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나도 그분처럼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고, 무엇보다 내가 모르는 낯선 세상이 내가 아는 상식과 도덕률에 의해 돌아간다고 믿는 근거가 됐다. 그게 턱없는 낙관이었음은 일찌감치 판명이 났지만.

최근 연이어 보도되는 세상 갑들의 추태를 볼 때마다 심란해진다. 지금 어린 아이들은 이런 세상을 보면서 어떤 믿음을 쌓을까? 설령 훗날 틀린 것으로 판명 날지라도 낙관적 희망을 갖는 게 나을까, 아니면 잔인한 현실을 미리 학습하는 편이 나을까? 해답은 없고 갑갑증만 사람을 괴롭힌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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