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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을 벗어난 종이 위 활자들, 디자인 입고 한바탕 활극 펼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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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을 벗어난 종이 위 활자들, 디자인 입고 한바탕 활극 펼쳐

입력
2015.05.28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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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시인 희곡 ‘블랙박스’

김바바 디자이너와 협업해 출판

말소리에도 종류가 있다. 어떤 소리는 크고, 어떤 소리는 기어들어가며, 어떤 소리는 발설과 동시에 흩어진다. 침묵도 마찬가지로, 어떤 침묵은 비난보다 날카롭고 어떤 침묵은 위로보다 둥그스름하다. 대화를 구성하는 이 요소들을 시각화하고 싶은 욕구는, 따라서 그렇게 유별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문학의 활자들은 타이포그래피적 본성을 타고나며, 다만 시장의 생리 때문에 그 본성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김경주(오른쪽) 시인과 그래픽디자이너 김바바씨가 아지트격인 상수동 이리카페 앞에 앉아 있다. 김경주 시인 제공
김경주(오른쪽) 시인과 그래픽디자이너 김바바씨가 아지트격인 상수동 이리카페 앞에 앉아 있다. 김경주 시인 제공

김경주 시인의 희곡 ‘블랙박스’(안그라픽스)는 시와 극이 그 타이포그래피적 본성을 참지 않고 표출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김경주 시인이 쓴 시극(대사가 시의 형식으로 쓰인 희곡)을 그래픽 디자이너 김바바씨가 활자 디자인을 통해 재구성한 것으로, 종이 위에 얌전히 배열돼 있어야 할 활자들이 사방팔방 떠돌아다닌다.

‘블랙박스’는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비행기 안, 두 사람의 끊기지 않는 대화로 이뤄진다. 누구의 머리가 알고 보니 가발이라느니, 고속도로 휴게소의 손지압 마사지기가 훌륭하다느니, 시시껄렁하고 의미 없는 말의 범람 뒤에 두 사람은 애써 불안을 감춘다. 이 불안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시인의 주문은 다음과 같다.

“이 극에서 지문은 구름들이 대본 속으로 서서히 차오르는 느낌으로 표현되고 있다. 허공은 지문 속에서 지문 바깥으로 나오는 하나의 형(形)으로 우리가 해독하기 어려운 공간과 시간으로 흘러간다. ‘사이’와 ‘정적’의 질감도 나뉠 필요가 있는데, ‘사이’가 세밀한 곳에서 전체로 퍼지는 공기의 밀도를 가지고 있다면 ‘정적’은 전체에서 세밀한 곳으로 모아지는 공기의 질감이다. 따라서 이 극에서 지문은 기내를 항해하는 또 하나의 시차를 가진 이야기다.”

이 알쏭달쏭한 주문을 김바바씨는 활자의 위치와 크기, 색깔을 통해 구현했다. 각각의 대사는 대본 위에 구름처럼 떠 있고, 지문은 그 사이를 유영하며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정적’과 ‘사이’는 각자의 성격에 따라 필요한 만큼의 분량과 위치를 점하며, ‘탕’과 같은 총소리는 페이지 하나를 통째로 할애해 그 위력을 뽐낸다.

시와 타이포그래피의 만남은 통상 ‘실험적 시도’라 불리지만, 실제로 보면 지극히 자연스럽다. 본래의 크기와 위치를 회복한 활자들은 목줄을 뜯어낸 들짐승처럼 생기 넘친다. 김경주 시인은 “희곡이 공연이 아닌 출판의 형태로 보여질 때 그 전달방식은 오늘날 독자들에게 매우 낯설다”며 “시가 극을 통해 그 본질에 다가서는 것처럼, 희곡도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본래의 모습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블랙박스’는 김경주 시인과 김바바 디자이너가 함께하는 ‘활자극장’ 운동의 1호 결과물이다. 두 사람은 시인이 쓴 희곡집을 타이포그래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이 시극을 바탕으로 만든 연극 ‘블랙박스’도 내달 3~21일 대학로 스튜디오 76에서 선보인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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