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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작가… 야생의 언어·문장들과 씨름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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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작가… 야생의 언어·문장들과 씨름해 볼까

입력
2015.06.1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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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공쿠르상 수상 파스칼 키냐르

시·산문·소설 넘나드는 독특한 글쓰기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발행·320쪽·1만4,000원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발행·320쪽·1만4,000원

“나는 결여된 언어를 성급하게 침묵의 형태로 맞바꾼 아이였다.”

언어의 결여 앞에서 택할 수 있는 선택지 중 침묵보다 더 섣부른 건, 기존의 언어체계에 편입되는 것이다. 언어를 공유한다는 것은 사회 안으로 들어오기 전 가장 먼저 해야 할 약속 중 하나이고, 대부분은 감히 약속을 거부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차린 것 없는’ 언어의 밥상에 만족하고 사는 것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에세이 ‘혀 끝에서 맴도는 이름’에 나온 저 구절 속의 감정이 자책인지 아니면 다행스러움인지(성급하게 부실한 밥상을 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건 키냐르가 어린 시절 지독한 자폐증을 앓았다는 것, 그리고 그가 차린 상 위엔 한 번도 본 적 없는 야생의 언어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키냐르의 소설 ‘신비한 결속’이 출간됐다. ‘작가들의 작가’라 불리는 키냐르의 글은 과연 야생에서 채취한 식물처럼 소화가 안 되기로 유명하다. “줄거리는 아예 없거나 아니면 아주 어렴풋하고 모호”하며 “문장과 문장 사이를 연결하는 의미의 맥락은 아주 성글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단절과 휴지”(장석주 ‘풍경의 탄생’)가 밥 먹듯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마흔 여섯의 여성 클레르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번역가인 클레르는 세계 각지를 누비던 생활을 그만두고 번역가 일도 접은 뒤 고향인 바닷가 마을 라클라르테로 돌아온다. 고향에 대한 기억 중 아름다운 것은 하나도 없다. 끔찍한 사고로 부모를 잃은 클레르는 동생 폴과 함께 큰아버지 집에 더부살이를 하며 못돼 먹은 사촌들로부터 지독하게 괴롭힘을 당했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죽 함께 해온 연인 시몽만이 그와 고향을 연결시켜주는 고리다. 그러나 이미 결혼해 아이까지 둔 시몽은 클레르와 만남을 이어갈 수 없고, 결국 시몽을 잃은 클레르는 비로소 삶의 유일한 집착에서 놓여난다.

상기했듯 이 소설에서 줄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시몽을 잃은 클레르가 “이 세계와의 접속”을 점차 끊어가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대부분의 공을 들인다. 새벽이 오기 전에 일어나 바닷가의 험한 바위 사이를 누비는 클레르는 들판에서 오줌을 누고 혀를 내밀어 바닷물을 핥아 먹은 뒤 다시 발길 닿는 대로 쏘다니는 야생의 생활을 한다.

자연과 점차 하나되는 클레르의 모습에서 연상되는 하나의 단어는 ‘결별’이다. 그것은 오래 전 작가가 이 세계의 언어를 받아들이기 전 “성급하게” 선언했던 결별이기도 하고, 멀지 않은 미래에 그가 경험하게 될 세계와의 결별, 즉 죽음이기도 하다(올해 67세인 작가는 10여년 전 심한 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클레르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희미한 부러움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작가에게 죽음이란 종말이 아닌 회귀, 즉 사회적 언어를 접하기 이전 백지 상태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듯하다. 대표작인 ‘은밀한 생’의 한 구절을 보면 사회의 언어에 대한 작가의 증오가 얼마나 뚜렷한지 알 수 있다.

프랑스 공쿠르상 수상작가인 파스칼 키냐르. 시와 산문과 소설을 넘나드는 독특한 글쓰기로 고정 팬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는 이번 소설 '신비한 결속'에 가장 많은 애착을 느낀다고 밝혔다. ⓒJerome BONNET
프랑스 공쿠르상 수상작가인 파스칼 키냐르. 시와 산문과 소설을 넘나드는 독특한 글쓰기로 고정 팬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는 이번 소설 '신비한 결속'에 가장 많은 애착을 느낀다고 밝혔다. ⓒJerome BONNET

“언어가 나타나면, 엿보는 자가 나타나고, 사회가 나타나고, 가족이 재등장하고, 갈라놓는, 후(後)-성적(性的)인 분리가 재등장하고 질서?도덕?권력?위계?내면화된 법이 몰려든다.”

언어의 사회성이 우리의 은밀한 생을 방해한다고 고자질하는 파스칼 키냐르. 그 극단의 결벽 앞에선 미소 지을 수밖에 없다. 사회, 가족, 질서, 권력에 오염되지 않은 언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언어의 진창에 빠져 사는 우리는 “아닌 건 아니잖아요”라고 또랑또랑하게 주장하는 67세 어린이 앞에서 부끄러움과 체념의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작가 덕에 우리는 그 뒤에 숨어 가끔씩 항의해볼 순 있다. 제발 나의 삶을 엿보지 말라고.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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