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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고 구본무 LG 회장의 수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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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고 구본무 LG 회장의 수목장

입력
2018.06.07 19:01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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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신비로운 탄생의 고고한 울음은 백 년을 가기 어렵다. 삶을 어떻게 사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지구별에 잠깐 소풍왔다 가는 기록을 자서전으로 남기는 일도 유한한 삶의 안타까운 몸부림일 수 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모두 내려놓을 일이다.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께서 당신이 사랑한 나무 밑에 묻혔다. 유언으로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이라는 선영(先塋)이 아닌 수목장(樹木葬)을 택했다. 세계적 기업을 운영한 최고경영자의 마지막 가는 길이 예사롭지 않다. 살다 간 조그만 흔적을 자연에 동화되면서 나무 밑에 남기는 그 거인의 겸손이 감동으로 전해진다. 구 회장은 이윤의 극대화로 치닫는 치열한 경쟁의 현장에서 인품 있는 경영철학으로 늠름하게 나무처럼 사셨는지도 모른다. 오랜 동안 손수 가꾸었던 곤지암 골프장의 2,000 그루가 넘는 명품 소나무와 회사의 상징목으로 사랑했던 수백 그루 거목의 느티나무들이 떠오르지만 어디를 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무사랑의 완성으로 20여 년 심혈을 기울였던 골프장 옆 화담숲 주변의 어느 나무라는 보도만 있다.

화장률이 9할에 가까운 시속의 변화도 있지만 통 큰 선택이라기보다 자연에 묻힌 구 회장의 나무사랑이 지극했음을 짐작한다. 국민의 6할이 아파트 위아래 옆 칸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인간의 존엄보다는 푸시버튼의 편리함만을 추구하며 산다. 후손들의 어떤 사치나 편리성 때문에 죽어서까지 축소된 아파트 같은 층층이 포갠 납골당으로도 간다. 조그만 유리상자에 갇힌 망자의 답답함은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는지 알 바 아니다. 이제 자연으로 돌아가는 선구적인 실천이 구 회장의 수목장으로 나타난 것이다. 살아있는 나무는 고인의 살아있는 아바타이다. 비석을 세우지 않아도 사람보다 더 오래 남을 그 나무는 손주가 보고 싶은 할아버지의 기를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다.

수목원을 구상하면서 국내외 수목원을 찾아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말 못 하는 나무들과의 교감이기도 했고 이를 디자인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였다. 구 회장의 조경을 사숙(私淑)하게 된 인연은 우연이었다. 19년 전 구두회 대학동창회장께서 올곧은 선비정신 구현을 위해 내가 설립한 ‘지훈상’(芝薰賞)을 격려하면서 곤지암 골프장 주중회원권을 주셨다. 골퍼들이 찾고 싶은 품격 있는 꿈의 필드이지만 나는 운동보다 구본무 회장의 거대한 수목원을 꿈꾸는 조경에 빠져들었다. 잘 가꾼 광활한 양잔디에 군집한 장송의 우람한 기상과 도열한 느티나무의 넉넉한 품이 그러했다. 영산홍 군락지, 억새밭, 장송 사이에 악센트를 주는 홍단풍의 팁은 절창이었다. 운동 중에 가끔 마주치는 조경사들도 나의 스승이었다. 활엽수도 가지를 솎아내 빛과 바람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이때 배웠다. 10여 년 수목원에 나무를 심으면서 항상 느꼈던 허기진 갈증은 따르고 싶은 너무 높은 선각자의 꿈을 기준으로 잡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구 회장님, 나무와 함께 평안히 영면하소서.

우리옛돌박물관을 설립한 천신일 회장의 배려로 3년 전에 석인(石人) 40분이 나남수목원 새 식구가 되었다. 200 년이 넘는 문화재급 문인석(文人石)들이다. 수목원 시작 때부터 격려와 지도를 아끼지 않으며, 3,000 그루 반송의 위풍당당한 위세를 좋아하셨다. 넓은 잔디밭과 고졸(古拙)한 정자, 우람한 석등(石燈), 큰 나무들, 넓은 호수, 도열한 문인석들, 그리고 3,000 그루의 반송이 만들어 내는 3만 평의 공간은 품위 있는 능(陵)의 풍경으로 비친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수목장을 하겠다고 추모숲으로 공개하라는 선배들의 채근에 시달리고 있다. 저 어느 나무 밑에 나무처럼 살다 영면하는 평화가 손에 잡히는 듯하다.

조상호 나남출판ㆍ나남수목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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