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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모' 신화를 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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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모' 신화를 깨라!

입력
2017.02.24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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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드라마 '명성황후'의 OST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명성황후(이미연). 이 때 나왔던 '내가 조선의 국모다'를 발언은 한동안 유행어가 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KBS드라마 '명성황후'의 OST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명성황후(이미연). 이 때 나왔던 '내가 조선의 국모다'를 발언은 한동안 유행어가 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조선을 홀린 무당 진령군

배상열 지음

추수밭 발행ㆍ264쪽ㆍ1만4,000원

“내가 조선의 국모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수준의 난제다. 외환위기의 아픔이 있었고, 2000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가 있었다. 그러니 2001년 조수미의 뮤직비디오 ‘나 가거든’에서 ‘명성황후’로 나온 배우 이미연이 외친 이 한마디는 그야말로 ‘절대선’이 되어 버렸다. 이 말을 실제로 했냐, 안 했냐는 둘째 문제다. 중요한 건 저 발언이 주는 카타르시스다. 그 카타르시스에 묻혀 명성황후가 진정 국모에 걸맞게 행동했는가, 라는 문제는 묻혀 버렸다. 명성황후를 ‘민비’라 부르기만 해도 일제에 물든 나쁜 놈으로 내몰릴 판이다.

한 나라의 왕비가 외국의 낭인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고, 그 외국이 결국 우리를 식민지로 삼아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동시에 조선 후기 근대의 싹을 찾아 헤매던 이들이 의지했던 영ㆍ정조 시대와 실학이 실은 별로 그렇지 못하다는 결론으로 치닫자, 일군의 학자들은 광무개혁을 근거로 ‘고종은 비운의 계몽군주’였다는 해석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에 맞섰다는 이유로 명성황후는 명석한 개화파의 일원이 됐다.

이 구도에 균열을 낸 것은 뜻밖에도 박근혜 대통령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그간 잊혀진 ‘진령군(眞靈君)’이란 이름이 등장해서다.

‘조선을 홀린 무당, 진령군’은 바로 이 진령군을 정면으로 다룬 책이다. 조선에서는 천인 중 천인이던 무당임에도 왕족에게 붙는 군(君)의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군이란 칭호, 군호란 조선 성리학자들의 우상이던 이율곡의 어머니가 받은 ‘사임당(師任堂)’이란 ‘당호’보다 한 수 위다. 대체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런 파격적 대우를 받았던가.

고종 즉위 뒤 섭정에 나선 대원군은 많은 실책에도 불구하고 허물어진 나라 살림을 되돌려

놓는 등 왕권강화에 기여한 공 또한 적지 않다. 대원군이 그나마 쌓아둔 이 공을 까먹은 것이 바로 명성황후다. 사치와 낭비가 심했고, 민씨 친족들에게 일일이 벼슬 챙겨 주느라 나라의 기강은 엉망이 됐다.

이유는 있다. 왕권강화를 위해 ‘정치적 배경’ 없는 며느리로 골랐는데, 그럴수록 거꾸로 명성황후가 기댈 곳은 오직 아들과 친족 뿐이어서다. 고종은 후궁에게서 먼저 아들을 얻었다. 무당, 굿, 제사가 잇달았다. 아들(훗날 순종)을 낳았으나 병약했다.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금강산 일만이천봉 위에다 재물을 가져다 바치고, 날마다 백미 500석으로 지은 쌀밥을 한강에 뿌리기도 했다. 국가재정도 재정이지만, 사람들 눈에 이런 행동이 어떻게 보였겠는가.

그 결과 가운데 하나가 임오군란이다. 돈을 엉뚱한 데다 쓰니 병사들에게 13개월이나 월급을 주지 못했다. 모래 섞이고 다 썩은 쌀을 월급이랍시고 내놓자 병사들이 폭발했다. 항의하는 병사들을 붙잡아다 사형시키겠다 한 이도 민씨 집안의 민겸호였다. 난을 일으킨 병사들은 민겸호를 처참하게 때려 죽였다. 민씨 집안 우두머리 명성황후도 당연히 처결대상이었다. 눈에 핏발이 선 채 피 뚝뚝 떨어지는 칼을 휘두르는 군인들은 창덕궁까지 치고 들어갔다.

창덕궁을 겨우 빠져나온 명성황후는 배탈, 설사, 학질에 시달리며 충주까지 가까스로 도주했다. 충주로 간 것 역시 충주목사가 민씨 친족인 민응식이어서다. 언제 자객이 나타날까 벌벌 떨던 명성황후 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이름 없는 충주 지방 무당. 그녀는 대담하게도 “곧 환궁할 것이니 옥체를 보존하고 걱정말라”고 말했다. 곧 이어 청나라가 조선에 개입하면서 실제 명성황후는 환궁했다. 명성황후에게 이 무당은, 하늘이 내린 이로 보였을 법하다. ‘진령군’은 그렇게 탄생했다.

나중에 망국의 한을 품고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황현이 ‘매천야록’에 써 둔 이후 행적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무당은 관운장의 영을 받은 딸이니 사당을 지어 받들게 해 달라고 했고 이에 명성황후는 숭인동에다 관왕묘(關王廟)를 세웠다. 무당은 수시로 고종 내외를 만났고, 고종 내외는 상을 내렸다. 이를 안 관리들은 진령군을 ‘누이’라 부르거나 ‘의붓아들’을 자처했다. 김해 출신 이유인이란 자가 속임수를 써서 진령군에게 자신이 귀신을 부린다고 했다. 이유인은 이후 양주 목사가 되었으며 진령군과 모자 관계를 맺었다.”

황현은 강경보수에 가까운 인물이고 매천야록이 일종의 야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과장이 섞여들 수 있다. 그러면 좀 더 정제된 정보는 어떨까. 사간원 정언(正言) 안효제가 내놓은 기나긴 탄핵문의 핵심 구절은 이렇다. “요사이 괴이한 귀신이 몰래 여우 같은 생각을 품고 스스로를 성제(聖帝)의 딸이라고 거짓말”을 한 이가 “잇속을 늘리기 즐겨 하며 염치가 없는 사대부들을 널리 끌여들여서 아우요, 아들이요 하면서 서로 칭찬하고 감춰가며 가늠할 수 없는 권세를 부려 위엄을 보이거나 생색”을 냈다 한다. 이 상소문을 올린 안효제는 당연하게도 유배됐다. 이렇게 위세를 부리던 진령군은 명성황후 시해 뒤 조용히 사라져 갔다.

저자의 과녁은 명확하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개입을 요구한 건 명성황후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것 또한 명성황후의 꾀였다’와 같은, ‘쇄국론을 주창한 노회한 대원군에 결연히 맞선 영특한 명성황후’라는 신화에 대한 해체작업이다. 명성황후를 두고 “속은 게 아니라 속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평가한 문장이 아프다. 그러고 보니 명성황후에게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치게 한 뮤직비디오의 감독은 차은택이었다.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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