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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훈장과 국격

입력
2015.11.25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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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방송’ KBS가 자사 탐사보도팀이 힘겹게 만든 다큐멘터리 ‘훈장’을 몇 달째 방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짐작하건대 다큐멘터리 ‘훈장’은 과거 정부, 특히 박정희 정권이 국가가 아니라 오로지 정권에 충성한 인사들에게 부적절하게 훈장을 달아준 사실을 까발렸을 터이고, 이것이 지금 정권의 역린을 건드렸을 것이다. 수신료를 받고 있고 이마저 더 올려 달라는 방송사가 공공성을 상실한 채 정권 입맛에 놀아나는 것 같아 불쾌하다.

훈장은 국가를 위해 크게 공을 세운 분들에게 국가가 주는 최고의 영예이지만, 동시에 이를 수여하는 측은 권력을 잡은 위정자라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국가에 많은 공을 세웠더라도 정권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훈장을 받을 가능성은 낮아진다. 정권을 잡은 측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훈장을 달아주면서 국가가 아니라 사실상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서훈 내역을 살펴보면 특정 정권의 국가관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를 성찰하는 계기도 된다. KBS 제작진이 ‘훈장’을 만든 의도도 대충 이런 것이었을 터이다.

이승만 박정희 정부 시절 친일행적자 등에게 훈장을 수여했다는 내용의 ‘훈장 2부작’. KBS 탐사보도팀이 2013년부터 취재해 만든 이 프로그램의 방영이 명확한 이유 없이 미뤄지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승만 박정희 정부 시절 친일행적자 등에게 훈장을 수여했다는 내용의 ‘훈장 2부작’. KBS 탐사보도팀이 2013년부터 취재해 만든 이 프로그램의 방영이 명확한 이유 없이 미뤄지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황당한 사실은 우리 정부가 국가의 최고 포상행위인 훈장 수여 내역의 상당 부분을 오랫동안 국민들에게 숨겨왔다는 것이다. 국가가 무슨 조폭 집단도 아닐 터인데 첩보 작전을 벌이듯이 훈장을 준 사실조차 감춰왔다니, 단적으로 국가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이다. 때문에 KBS 제작진이 2년여의 정보공개 소송 끝에 올해 초 70만 건의 서훈 명단을 확보한 것은 그 자체가 커다란 특종이면서, 훈장의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한 그야말로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지금껏 훈장을 받은 사람 대부분은 물론 멸사봉공한 훌륭한 분들이다. 하지만 특정 정권의 입맛에 따라 훈장이 남발되었고 이것이 은폐되어온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친일 인사들이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을 받았는가 하면,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사람들이 훈장을 달았다. 2년여 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집권 기간 중에 본인에게 수여한 이른바 ‘셀프 훈장’들을 일부 반납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훈장사(勳章史)에는 여전히 구린내가 진동한다.

특히 박정희 정권 18년간 훈장은 특정 이해관계에 의해 ‘거래’되기 일쑤였다. 무고한 국민을 잡아 고문해 간첩으로 둔갑시킨 공안조작 사건의 실행자들에게 국가안보에 기여했다며 훈장을 달아줬다. 반면, 차가운 감방에서 수십 년을 보내야 했던 고문 피해자는 이런 적반하장의 국가에 태어난 것을 저주했다. 잇단 재심 판결로 무죄를 선고 받았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저지른 후안무치의 역사는 쉬 해소될 리가 없다.

박정희 정권 시절 무더기로 일본의 우익 인사들에게 훈장을 준 사실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조부이자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는 1970년 8월 상훈법에 따라 ‘국권의 신장 및 우방과의 친선에 공헌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한다’는 수교훈장을 받았다. 일제 식민지 때 이른바 ‘황도(皇道)’ 사상을 부르짖으면서 각종 전쟁 이권을 챙기고 전후에는 암흑 조직의 거간꾼으로 맹활약한 고다마 요시오도 이 훈장을 받았다. 일본에서조차 ‘검은’ 인물로 치부되는 인사들을 한국 정부는 왜 영웅으로 받들어 모신 것일까.

훈장은 그 나라의 국격(國格)을 대변한다. 모든 국민들이 훈장을 받기 위해 국가에 충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대국가에서 훈장은 훌륭한 국민의 징표이자 국가권력의 발로이다. 국가가 국민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고자 한다면 제대로 된 국가관에 입각해 서훈해야 마땅하고, 이것이 국가를 유지ㆍ발전시키는 최소한의 요건이다.

‘비정상의 정상화’가 필요한 것은 교과서 국정화를 통한 국가 미화(美化)가 아니다. 국민들이 나라가 주는 훈장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자면 잘못된 훈장의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역대 정권들이 국가를 팔아 잘못 수여한 훈장은 당연히 다시 거둬들여야 한다. 그 출발은 다큐멘터리 ‘훈장’을 보는 것이다.

이동준 일본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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