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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막장에서… 책을 통해 제2의 인생 찾은 우리 이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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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막장에서… 책을 통해 제2의 인생 찾은 우리 이웃들

입력
2015.05.15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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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다시 살다 숭례문학당 엮음 북바이북 발행·276쪽·1만4,000원
책으로 다시 살다 숭례문학당 엮음 북바이북 발행·276쪽·1만4,000원

유명 외국계 은행을 다니며 승승장구하던 장정윤씨의 삶에 제동이 걸린 건 아들의 이상행동 때문이었다. 여섯 살 난 둘째 아들은 장씨가 밤 12시 넘어 집에 들어가면 자기 방이 아닌 거실 한 구석에 이불을 둘둘 말고 자고 있곤 했다. TV를 보며 서서 오줌을 싸고 발음도 불명확한 아이를 보다 못해 소아정신과로 데려가자 의사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초기 판정을 내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장씨에게 의사는 “회사와 아이 중 하나를 택하라”고 말했다. 결국 회사를 그만 둔 장씨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면서 아이 교육에도 도움이 될만한 일거리를 찾다가 독서지도사 공부를 시작했다. 그동안 경제 관련 서적만 읽었던 장씨에게 독서지도사 수업은 충격이었다. 어린이 책이 그토록 깊은 철학을 품을 수 있다는 것, 함께 책을 읽는 행위가 엄청난 치유 효과를 일으킨다는 것, 모두 예전엔 몰랐던 사실이었다.

장씨는 매일 아이를 꼭 안은 채 그림책을 읽어줬고,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아이의 이상행동은 거의 사라졌다. 책이 바꾼 건 아이뿐만이 아니었다. 책이 사람을 바꾸는 현장을 목격한 장씨의 인생도 이전 같을 수 없었다. “책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다. 그 속에 담긴 내용도 저자의 것이 아니다. 책을 읽는 그 순간에 그것은 나와 아들의 것이 되었고, 우리는 그 속에서 재미를 느끼고 놀며 서로의 마음을 치료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인 책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독서공동체 숭례문학당에서 엮은 ‘책으로 다시 살다’는 책으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25인의 간증기다. 실직, 은퇴, 사업실패, 교통사고, 끝없는 간병 등 삶에 지치고 절망한 이들이 책과 독서토론을 토해 어떻게 방황에서 벗어나게 됐는지를 들려준다. 베이비붐 세대인 윤영선씨는 퇴직을 앞두고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인문학 서적을 통해 다른 세상을 발견했다. 책이 전공 공부의 도구가 아닌 인생 공부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50세 나이에 처음 깨달았다. 일상의 쳇바퀴 안에서 밀쳐놓았던 두꺼운 철학책들이 잊고 있던 윤씨 자신의 모습을 일깨워줬다. “나는 기질적으로 믿는 사람이기보다는 생각하는 사람 쪽에 가까웠다. 돌이켜보면, 안타깝게도 나는 오랫동안 이 타고난 기질을 억누르고, 믿음에 맹종하며 살았다. 내 생각과 판단은 중요치 않고, 오직 권위에 복종하고 모르면 정답을 외워야 하는 그런 사람들과 책에 둘러싸여 있었다.”

독서공동체 숭례문학당 당원들의 독서토론 현장. 2008년 11월 숭례문 앞에 둥지를 튼 숭례문학당은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며, 책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놀이와 공부법을 실험 중이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제공
독서공동체 숭례문학당 당원들의 독서토론 현장. 2008년 11월 숭례문 앞에 둥지를 튼 숭례문학당은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며, 책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놀이와 공부법을 실험 중이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제공

회사 부도와 투자 사기로 절망에 빠져 있던 윤석윤씨, 교통사고로 장기간 병원신세를 져야 했던 서미경씨, 직장 생활과 양육에 치여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박은미씨 모두 책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이들은 유달리 학구적이거나 타고난 독서광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독서 갱생기’는, 명사들의 근엄한 독서 권장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울림을 준다. 삶의 험난한 골짜기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책을 부여잡은 이들의 이야기에는 새치름한 종이 냄새 대신 사람의 땀내가 가득하다. 결국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서재 유리창 뒤의 책이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 너덜너덜해진 책들이다. 숭례문학당 당주인 신기수씨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답은 책이 아니다. 사람이다. 책 읽는 사람이 희망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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