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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힘센 거악과 맞짱 뜨는 '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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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힘센 거악과 맞짱 뜨는 '칼잡이'

입력
2014.08.2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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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했던 시절… 문민정부 때 특수수사 개막 권력형 비리 줄줄이 캐내

외로운 길 걷는 숙명… 힘센 적 생기는 것 불가피, 권력에 무릎 정치검찰 오명도

대검찰청 앞 검찰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검찰청 앞 검찰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거악척결(巨惡剔抉)’. 검찰 내 특별수사통(특수통) 검사들이 가장 즐겨 쓰는 문구다. 형사부 검사들이 민생침해 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공안부 검사들이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지키는 게 주된 역할이라면, 자신들은 가장 힘센 자들과 맞서 싸운다는 나름의 자부심과 정체성이 응축돼 있는 표현이다. 거악과 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때로 권력에 무릎 꿇어 ‘정치검찰’이라는 오명을 쓰는 것도 특수부 검사들이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거악의 의미

거악을 소탕하는 게 언제나 특수검사의 몫이었던 건 아니다. 검찰 입장에서 보자면, 1950년대 건국 초기엔 대공사범이, 60~70년대엔 경제개발을 저해하거나 군사정권 유지에 반발하는 세력이 거악이었다. 80년대 중반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공안검사 전성기’가 장기간 지속됐던 이유다.

하지만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사정이 바뀌었다. 정권 실세와 재벌들이 특혜와 돈을 주고받는 정경유착 관행이 낱낱이 드러나자 검찰의 칼은 부패한 권력층, 탐욕스런 자본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대선자금 수사에 참여했던 A검사는 “특수 사건이란 기본적으로 부패와 비리, 그 중에서도 뇌물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특수수사는 문민정부 때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칼잡이’의 시대가 90년대부터 열린 것이다.

일단 무대가 만들어지자 특수검사들은 권력형 비리를 줄줄이 캐기 시작했다. ▦청와대 비서관과 국회의원 5명이 뇌물수수로 구속된 수서지구 택지분양 비리 수사(91년)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를 구속한 한보그룹 비리 2차 수사(97년) ▦대선자금 수사의 단초를 제공한 SK그룹 분식회계 사건 수사(2003년) 등이 대표적이다.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역시 2003~2004년 불법 대선자금 및 대통령 측근 비리 사건, 그리고 2006년 현대기아차그룹 비자금 사건이었다. 특수부 검사들은 “대선자금 수사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를 투명하게 바꾸는 계기가 됐고, 현대기아차 수사는 재계 2위 그룹의 오너라도 비자금을 만들면 구속된다는 선례를 남겼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수통의 가장 ‘화려한 시절’은 바로 이때였다.

울고 웃는 수사기법

특수수사는 거물을 다루다 보니 수사기법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계좌추적, 회계분석, 통화내역 등 증거 수집도 중요하지만, 특수부 검사들은 사건의 시작과 끝은 ‘진술’이라고 말한다. B검사는 “뇌물 사건은 ‘돈을 줬다’는 진술 없이는 안 된다. 진술이 기본”이라고 말했다. 특수통 출신의 변호사 C씨도 “통신내역 조회, 계좌추적을 아무리 많이 해도 결국 사람한테 ‘이게 뭐냐’고 물어야 한다”고 했다.

진술을 받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밤샘 수사가 가능했던 시절에는 피의자에게 다짜고짜 “써와!”라고 지시한 뒤 뭐라도 써오면 진술서 찢기를 다섯 번이나 반복해, 결국 피의자 스스로 생애 모든 잘못을 다 쓰게 만들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한 검사는 대기업 총수에게 사과를 깎게 해서 심리적 제압을 했다고 한다. 마치 내연녀 집에 압수수색을 갈 것처럼 수사관과 검사가 거짓 전화통화를 하는 모습을 일부러 보여준 뒤 진술을 받아낸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특수부 조사실은 고도의 심리전이 펼쳐지는 곳이다. 한 특수부 검사 출신 변호사는 “구속 중인 피의자 생일날 검사실에서 케이크와 고깔모자로 생일잔치를 열어 마음을 산 적도 있다”고 했다. 한 부장검사는 “일단 거짓말을 실컷 하도록 내버려뒀다가 나중에 그것을 하나씩 파고들면 피의자는 무너지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배드 캅, 굿 캅’의 방법도 동원된다. 후배 검사들이 피의자를 인정사정 없이 몰아친 뒤, 선배 검사가 나타나 ‘그렇게 조사하면 안 된다’며 따뜻하게 감싸줘 감격한 피의자가 진실을 털어놓게 만드는 식이다.

당대 최고 칼잡이로 불린 최재경 전 인천지검장은 수사 현장에선 ‘설득의 대가’로 통한다. 대검 중수1과장 시절의 일화다. 후배 검사들이 진술 확보에 실패하자 과장인 그가 직접 피의자를 저녁 7시쯤 청사 앞뜰 벤치로 불러내 1시간 정도 함께 산책을 하며 인생 이야기를 나눴다. 산책을 마친 최 전 지검장은 후배들에게 “이제 조사 시작해라. 자백할 거다”라고 했는데, 거짓말처럼 피의자가 술술 입을 열더라는 것이다.

압수수색의 중요성도 크다. 대기업 수사를 했던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회장실 압수수색을 했는데 금고에 (분식회계 자료를 모아놓은) 핸드북 형태의 보고서가 있었다”며 “거기서 수사가 사실상 완성됐고, 그래서 때론 수사는 운이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수통은 검찰총장이 될 수 없다?

특수부 검사에게 힘센 적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D검사는 “특수수사 대상들은 대부분 권력과 금력을 갖고 있다. 수사 당시엔 검찰이 칼을 겨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역시 ‘안 보이는 총’을 계속 쏘고 있으며, 특수검사들은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고 있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변에 적들이 많아지다 보니 각종 모함에 시달리기도 한다. ‘싸가지 없다’ ‘편견으로 가득하다’ ‘증거를 무시한다’는 등의 인물 품평은 애교 수준이다. 수년 전 경차 한 대를 구입한 E검사는 누군가가 ‘고급 차량을 사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더니 본인이 직접 차 한대를 샀더라’는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닌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는 “나한테 수사를 받고 불만을 품은 누군가가 마타도어를 퍼뜨린 것”이라고 말했다.

역대 검찰총장 중에 ‘정통 특수통’ 출신이 많지 않은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특수검사의 최고 영예인 중수부장을 거친 총장은 이종남(21대, 87년 5월~88년 12월), 이명재(31대, 2002년 1월~12월), 김종빈(34대, 2005년 4월~10월) 등 손에 꼽는다. 중수부장 출신 박영수 변호사는 “권력층 수사를 하면 검사들은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특수검사들은 외로운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외압과 하명수사, 굽어지는 칼날

특수검사는 권력층을 상대하기 때문에 수사과정에서 외압이나 외풍에 시달릴 가능성도 많다. F검사는 “결국은 증거의 문제다. 확실한 증거를 잡고 있으면 누구도 얘기 못하고, 따라서 외압으로 느낄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다른 검사도 “만약에 윗선과 의견이 다르면 제대로 설득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겪어본 사람은 분명 외압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국정원 댓글사건 수사 때 윗선과 갈등하다 징계당한 윤석열 전 특별수사팀장도 당시 서울중앙지검장 집에 찾아가서 사법처리를 설득했지만, “야당 도와줄 일 있느냐, 내가 그만두면 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권력실세를 향한 특수수사는 정치적 파장이 크다 보니 하명수사 논란에 휘말리기 일쑤다. 정권 차원의 하명수사라는 의심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박연차 게이트’ 수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라는 비극으로 마무리돼 결국 중수부 폐지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이후 크고 작은 사건을 거치면서 침체 일로에 있던 특수검사들은 최근 국회의원 입법로비와 관피아 수사로 다시 한번 날갯짓을 시작하고 있다.

특수부의 전성기는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아니면 잔뜩 흐린 날씨 속에 잠깐 고개를 든 한 줄기 빛에 그치고 말 것인가. 특수수사의 미래가 무엇이든 특수수사 경력이 풍부한 G검사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 시대의 칼잡이들이 두고두고 새겨볼 만하다. “특수수사의 최고봉은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센 놈’들과 붙는 것이다. 예컨대 정권 말에 힘 빠진 실세, 또는 새 정권이 들어선 후 전 정권 인사들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권 초기 정권 실세들의 부패를 척결하는 것, 이게 진짜 특수수사다.” 어쩌면 검찰의 독립성과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실마리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김청환기자 ch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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